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책살롱 김은정 Aug 20. 2019

나의 사직동

내 마음 마음 한 켠에 있습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은

동네 꼬마들 모여 다방구, 벽치기, 오징어가이상, 삼팔선 게임 등을 하며 지냈다.

여자남자 구분없이 놀고 싶은 아이들은 다 나와 모여 놀면 되었고, 여자아이들은 검정색 고무줄 놀이를 신나게 하기 위해 치마 속에 바지를 입고 뛰어 놀았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면 뒴쫓아가도 놓쳐서 울고 또 뛰어 놀고 했던 추억이 있는 어릴 적 골목.

골목 이집 저집에서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라는 말이 들리기 전까지 뛰어 놀았다.


나의 사직동의 그림들을 보면 많은 추억에 잠긴다.

나의 사직동 책을 쓰담쓰담 해봅니다


내가 살던 곳은

내가 2살 때부터 27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25년을 살았다.


골목 입구 왼쪽에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구멍가게 안에 정말 필요한 문구용품도 팔았다.

골목 입구 오른쪽에는 방앗간이 있었고, 명절 때만 되면 줄서서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하루 전에 미리 언질을 두고, 쌀을 맡기셨다. 7시에 오빠들은 추석이면 잘 빻아진 쌀가루를 들고 오거나 설날이면 가래떡이 가득 담긴 빨간 통을 들고 왔다. 끙끙대면서.

골목 입구 오른쪽 방앗간 뒷집은 그 당시 첨단 미용실이 있었다. 지금처럼 머리를 뒤로 젖혀서 샤워기로 머리를 감겨주셨던 곳이다.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머리 감는 의자였다. 이 미용실이 생기면서 우리 동네 미용실 다 파리날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골목을 개천따라 조금 내려가면 쌀집이 있었다. 왼쪽 팔인지 오른쪽 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쪽 팔로 쌀을 이고지고 날랐다. 그 분은 가마니에 있는 쌀들을 햅쌀인지, 묵은쌀인지를 뽀족한 삽으로 콕 찍어 혀에 대어보고 단 번에 알아 맞추셨다. 그 당시 쌀집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였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문을 여닫는 텔레비젼이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사랑방에 모여들 듯 뉴스를 보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곤 하였으니까. 몇 년 뒤 우리집에도, 친구집에도 생겼지만 전설의 고향을 볼 때는 여전히 쌀집에 가서 보며 뭄서움을 달랬다.


쌀집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국수집이 있었다.

기저귀 널듯 길다란 국수가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선풍기가 여기저기 휘휘~ 바람을 쐬여주며 회전을 했다. 더운 여름 날, 지금처럼 바람이 조금 더 부는 날 국숫집 앞을 지나면 기분이 좋았다. 엄마 신부름으로 국수를 사러가면 2층도 아니고 다락방도 아닌 지금으로 보면 복층같은 곳에서 동그랗게 동그랗게 쌓여있는, 종이로 띠를 두룬 국수를 한 다발 들고 나와 건네주셨다. 집으로 오면서 한 줄 살짝 빼어 또각 또각 한 입씩 베어물고 왔다. 밀가루 냄새도 나면서 오래 머물면 스르륵 녹는 그 국수가 맛있었다.


한참 아래로 내려오면 구름다리 같은 짧은 다리를 건너면 약국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모두 '김약국집'으로 불렸다. 빨간약, 호랭이 연고와 안티프라민이 있었고, 모기물릴 때 마다 빨간약을 여기저기 발랐다. 조금이라도 아프다 싶으면 엄마는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셨고, 비싼 호랭이는 많이 멍들었을 때 큰 인심쓰듯 발라주셨다. '호~ 호~'하면서.


이렇게 27년을 살고 그 해 겨울에 결혼을 하면서 나는 목동으로 이사를 했다. 오랫 동안 정든 저의 고향을 두고 갔다. 그 후 2년 정도 뒤에 우리집이 팔렸다. 아파트로 재건축을 한다고. 친정집은  저의 고향인 그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5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엣 나의 집은 없어졌다.


내 마음에 구덩이가 푸욱 파인 것 같았습니다. 쇠갈퀴가 뱃속을 긁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손으로 배를 꾸욱 눌러야 했습니다
집까지 버스도 안 타고 걸어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앖고 고개만 가로저었습니다. 머릿 속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진돌이 생각만 자꾸 납니다.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여기는 사직동이진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는 없습니다.

다행히

지금의 친정집과 예전 살던 집과의 거리는 불과 1km? 2km정도 떨어져 있다.

그 옛정, 그 옛것을 잊는다는 건 무지 어렵다.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어린 곳은 잊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조금 더 돌더라도 근처에 종종 간다.

몇 년 전까지 있던 방앗간집은 편의점으로 바뀌었고, 미용실은 아주 낡은 옛 미용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골목의 쌀집과 약국은 빌라촌으로 바뀐지 오래이다. 그래도 내일은 정든 그곳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눈에 넣으려 눈으로 사진을 찍어 놓는다. 지금도 그곳의 어릴 적 추억이 보인다.


오늘,

한성옥, 김서정 작가님의 <나의 사직동> 그림책을 보면서 옛 추억에 젖는다.

나의 옛 중곡동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나의 옛 추억은 여전히 마음 한 켠에 있다.

오래 오래, 아주 오랫 동안 추억에 가슴에 있다.


이제 제 나이 5학년입니다. 반이 아직 없으니 옛 추억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도 아직 그 동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가도 그 동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나의 사직동은 있다. 나의 중곡동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전 10화 할머니의 노란우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