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보고 있는 에를렌
또 제가 궁금한 부분은 이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예요. 작품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게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전시를 보는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예요. 작품이나 전시와 관련된 게 아니어도 좋아요.
처음엔 그저 작품들을 보면서 '이 사람은 팝 아티스트구나, 정말 미국적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가 정말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여자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 건 맞아요.
그 후에는 그가 어떻게 예술과 시를 연결시키고, 코카콜라 여자 작품처럼 다른 문화와 결합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죠. 굉장히 개방인 공간과의 조화도 좋았어요. 실크 프린트들은 거의 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어 졌죠. 그런 촉각적인 경험이 제 머릿속에 어떤 감성을 열어줬다고 생각해요. 이런 측면 때문에 저는 늘 전시나, 회화 작품, 예술을 경험하는 걸 좋아하죠.
알다시피 오늘 전 친구와 갈등이 있었는데, 그 갈등에 대한 감정도 다시 떠올랐어요. 우리가 여기 오기 전 제 친구는 저를 화나게 했죠. 그런데 전시를 보며 차분해지면서 갈등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어요. 이곳에 너무 많은 판화들이 있어서, 그 인상들에 약간 짓눌렸을 때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잠시 앉아서 몇 가지를 적었죠. 어떤 것들을 소화해 낼 시간이 필요했어요. 전시와 판화들을 포함해서요. 이 전시에는 앉을자리에 없다는 게 오히려 좋았어요. 예를 들면 미술관에는 앉을 곳, 벤치나 의자 같은 휴식공간이 많잖아요. 하지만 이 전시에는 그런 곳이 없었고 그게 의도적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바닥에 앉아서 쉬면서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러자 마지막 공간으로 갈 준비가 됐죠.
전시장 벽면에 기대앉아 생각에 빠진 에를렌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어떤 이유로 괴롭고 짜증나 있을 때면, 전시장이 마치 명상 공간 같아요.
정확히 그래요.
네, 저는 그게 전시장을 방문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숨 쉴 공간을 찾는 거죠.
전시장의 공간은 굉장히 조용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네, 하지만 제게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아마 이게 우리의 차이점인 것 같은데요, 생각들이 그저 표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어요.
아,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생각이 나한테 오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굉장히 명상적인 방식으로 생각들이 찾아와요.
알렉스 카츠의 판화 작품
정말 맞아요.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 없이 말해주세요.
예술은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게 틀렸다고 생각해요. 저는 모든 건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술의 실험과 표현들은 우리가 방금 얘기한 것처럼 명상적인 경험, 일종의 공간을 만들어요. 제게는 더 감정에 관한 것이에요. 꼭 예술로 만들어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난 지금 예술을 하고 있어, 이럴 필요도 없고요. 예술은 그냥 우리는 멈추게 하는 무언가일 뿐이에요.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인가요
네, 제게는 아주 비슷한 경험이에요. 물론 그 예술이 좋을 때만요. 책을 읽을 때도 굉장히 명상적인 공간에 갈 수 있어요. 책을 읽을 때나 예술을 보거나 경험할 때,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들에게서 떠나요.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보다 성찰과 반성에 가까운 생각들이 저절로 떠오르죠.
굉장히 원초적인 경험이에요. 그래서 제게 있어 이런 경험은 예술의 어떤 작용이 이루어졌고, 이 예술이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좋은 예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예요.
에를렌과 대화를 나눴던 공간
미술을 좋아하게 되고 전시장을 자주 찾은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그렇게 전시를 많이 본 이유가 모든 작품이 좋아서, 모든 전시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이 날만해도 알렉스 카츠의 판화들이 내게 무언가를 남겼냐하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에를렌과의 대화를 나눈 후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미술을 찾게 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답이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그와 내가 전시를 보는 방법은 많이 닮아있었다. 전체 전시를 빠르게 훑은 후 다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보는 방식도, 마치 책을 읽듯이 전시를 읽는 것도, 그리고 그 과정이 마치 명상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내게는 생각이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할 때 숙제처럼 찾은 전시장에서 도리어 위로를 받은 경험이 많았다. 특정한 작품이 위로를 건네줘서는 아니었다. 희고 넓은 공간에 누군가의 숙고와 그 시간이 담긴 작품들이 놓여있는 모습을 보면 늘 고요해졌다. 텅 빈 공간에 놓여있는 수많은 압축된 시간들이 좋았다.
: 매주 목요일 연재되는『전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가 직접 전시장 안의 관객들을 만나 전시와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인터뷰어: 최보영 BoYoung Choi (수카 Sukha)
인터뷰이: 에를렌 셈 하르트겐 Erlend Sem Hartgen
인터뷰 진행일 : 2024년 7월 16일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시 공간: 타데우스 로팍 파리 팡탱 Thaddaeus Ropac Paris Pantin
전시 정보: 알렉스 카츠 Alex Katz 《판화 60년 60 Years of Printmaking》, 2024.05.25.-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