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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Feb 08. 2024

그리스의 심청

효녀 콤플렉스

  “안티고네가 ‘그리스의 심청’입니다. 그렇게 수필 쓰면 됩니다.”

  인문학 강의 중 임헌영 교수님은 불쑥불쑥 말씀하셨다. “OO으로 수필 쓰세요.”라고. 그러고는 덧붙여 “내가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은 안 쓸 거죠?”라고도 하셨다. 

  나 역시 ‘그리스 심청’이라는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못 썼다. 그 강의를 들었던 다른 작가들도 못-혹은 안- 쓴 것 같다. 썼다면 제목이 중복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번 기회에 써보려 한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친숙하고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큰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 아들 둘에 딸 둘까지 낳은 오이디푸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침드라마도 소화하지 못할 막장 중의 막장이다. 사실 오이디푸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연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할 것이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들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흔히 봐 온 신화에서처럼 아이를 죽이라 명한다. 영아 살해 뉴스를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끔찍하지만, 옛 신화에 빈번하게 나오는 장면과 겹쳐지니 인간의 잔혹한 민낯이 예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소름 돋는다.     


 훗날 신탁의 주인공이 될 아기는 어느 목동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목동은 남달라 보이는 아기를 아들이 없는 이웃 나라 왕에게 바친다.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란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게 되고 부모를 해치지 않기 위해 방랑길에 오른다. 그런데 하필 좁은 골목에서 친아버지인 라이오스와 다툼이 생기고 그가 친부인지 모르는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죽이게 된다. 

  그 후 테베에서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인 동물은?’이라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를 만난다. 그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어 친모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형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자매를 낳는다.     


  이로써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결국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어느 때부턴 인가 테베에 역병이 돌고 다시 내려진 신탁은 ‘라이오스 왕의 살인범을 찾아야 역병이 사라진다.’라는 것이다. 이에 범인을 찾다가 자신이 범인이며 친부를 살해한다는 신탁까지 결국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양 눈을 찌른다. 자신의 죄에 대해 속죄하려고 스스로 벌을 내린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떠난다. 권력으로 죄를 덮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감내하는 모습을 지금 권력자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것은 안타깝다.     


  이런 오이디푸스를 끝까지 돌보며 곁을 지킨 이가 안티고네다. 눈먼 아비와 그 곁을 지키는 딸. 딱 심청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안티고네의 곧은 심지는 서로 테베를 차지하려다 죽어버린 두 오빠 중, 반역자로 몰린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거두는 장면에서 더 빛을 발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임헌영의 문학과 인문학. 4.안티고네의 재판2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효녀 심청과 안티고네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 효심에 공감이 아닌 태클을 걸고 싶다.      


  어릴 적부터 나는 어서 커서 집안에 (경제적)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주변 이야기를 듣고 컸다. 특정인의 의도가 담긴 이야기가 아니고, 알고 지낸 주변 어른들 대부분이 하는 소리여서 그저 그 시대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성향이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과도한 책임감에 눌려 늘 쫓기듯 생활했고 그런 삶이 버거웠다.      


  심청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만으로 인당수에 뛰어들었을까? 버거운 삶을 놓고 싶은 마음은 정말 단 한 조각도 없었을까? 한 나라의 공주로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했을 안티고네는 아버지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늘의 법을 우선했기에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땅의 법을 어겼다는 꼿꼿한 안티고네였기에 나 같은 생각은 한 톨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는 내 능력밖인, 할 수도 없는 일까지 모조리 떠맡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효녀의 마음가짐을 강요당했건 아니었을까.     


  우리 아버지는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내 손을 잡고 숨을 거두셨다.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줄. 생명을 붙잡으려는 줄인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인지 모를 줄에 마지막 숨을 맡긴 사람들 틈에서, 생명 체크를 위한 기계만 달고 그렁그렁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연명치료 거부 서약서에 사인을 해두었기에 마지막 시간이 오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틀 밤 내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한 생명이 꺼져가는 풍경이 서글프다는 생각만 들었고, 그 인생이 가여웠다.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은 미움도 원망도 아니었지만, 사랑과 애달픔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설픈 동정심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밤새 울고 있는 내 뒤통수로 “아이고, 저런….” “쯧쯧쯧, 효녀네.” 같은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생각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생충》을 보기 힘들었던 나만의 이유에서)


  효도가 잘못됐다거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한 가치관 자체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부녀를 그린 내용 안에서 안티고네의 의미가 단순히 ‘효녀’뿐인 것도 아니다. 다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고전이나 명작을 보며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생각을 달리해보려는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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