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화 Feb 29. 2024

도사님, 도사님 저를 부자로 만들어주세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단편 『두자춘』

  겨울옷은 부피가 커서 박스 두 개에 나눠 담아 택배로 보냈었다. 헌 옷이라도 노숙자에게 잘 쓰일 거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신세가 되다니… 무료 급식소를 찾아다니고 옷을 얻어 입으며 하루 잠잘 곳을 찾는 일은 그냥 막막하다는 표현으로 다 할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도사님이 나타난 것은. 그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학계의 명망 높은 어르신이었지만, 다들 ‘도사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내 처지가 딱해 보였을까. 도사님은 내게 부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다. 묵혀두었던 내 글을 모아서 대형출판사에 출판해주겠노라 했다. 조건은 인세를 미리 지급해주고 3년간 추가 지급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금액이 무려 10억이었다. 3년 동안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아니 지난 30년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 해도 구경 못 할 큰 금액이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당장 계약서를 쓰고 일을 진행했다.     


  3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10억도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다.      


  다시 3년 전과 같은 처지로 떠도는 내게 기적처럼 도사님이 다시 나타났다. 도사님은 또 물었다. 부자가 되고 싶냐고. 당연히 내 대답은 3년 전과 같았다. 이번에는 모아둔 글도 없는데, 걱정하는 내게 이전 발행했던 책의 선인세를 다시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먹고 놀며 달콤한 아부만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내 책이 그동안 그렇게 잘 나갔다는 것인가? 궁금함도 잠시, 다시 같은 계약을 진행했다.      


  역시 3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10억도 역시 큰 금액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내 꼴을 보면 왜 저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느냐고 묻겠지만, 그저 내가 어리석어서였겠지. 그리고 나는 또 도사님을 만났고, 또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     

  다시 3년이 흐르고, 같은 꼴이 되고 나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참 빨리도 알았구나 싶었지만, 내게 다시 도사님이 나타날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도사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매달렸다. 나같이 답 없는 인간에게 세 번이나 기회를 준 도사님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나로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도사님은 자신의 말은 무엇이든 따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사님은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정신없이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고즈넉한 한옥이었다. 온돌방을 내주며 도사님은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말고 있어라. 절대 아무 말도 하면 안 된다.”


  대답할 틈도 없이 도사님은 사라졌다. 내가 방에서 혼잣말하든 노래를 하든 도사님이 알 방도는 없을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일까. 혼자 묵언 수행이라도 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혹시 어딘가 CCTV 같은 거라도 달아놓았을까? 아니면 도청장치라도? 이런저런 생각에 어지러움과 별개로 따뜻한 온돌의 기운에 잠이 쏟아졌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깨어나 보니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슬쩍 문을 열고 나가니 사람들이 잔칫상을 차리고 있었다. 도사님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들고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내게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꾸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음식을 가리키며 손짓, 발짓했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는 보디랭귀지였다. 이 사람이 도사님께 내가 말을 했다고 이를 수도 있으니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 눈치가 정말 없다. 달라는 음식은 안 주고 욕실로 안내했다. 더러우니 씻고 먹으란 소린가? 일단 씻고 나와 다시 음식을 달라는 손짓, 발짓을 이어갔지만, 다시 온돌방으로 안내할 뿐이었다.

  주린 배를 안고 기다렸지만, 도사님은 오지 않았다. 하루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이게 일종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휴대전화도 없고, TV도 책도 없는 방안에서 꾸르륵거리는 뱃속 소리만 듣고 앉아있으려니 지나간 시간을 저절로 돌이켜보게 되었다. 이러라고 말없이 있으라고 했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뜨니 사위가 적막했다. 일어나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았다. 딸깍거리는 소리는 났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보니 어느새 깜깜한 것이 밤이 깊었나 보다.

  잔치를 준비하던 사람들도, 잔칫상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을 찾아서 남은 음식이라도 뒤져 먹을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사님인가 싶어 다가가니 시커먼 복면을 쓴 사람이 나를 돌아봤다.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도둑놈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내가 말을 하는지 듣고 있을지 모르는 도사님 생각 때문이었다.

  도둑놈은 살금살금 내게 다가왔다. 일단 도망가려고 신발의 위치를 확인하며 뒷걸음치는데 뭔가에 쿵 부딪혔다. 도둑놈 투(2)였다. 꼼짝없이 붙잡힌 나는 꿇어앉은 자세로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집에 뭔가 비싸고 중요한 물건이 숨겨져 있나 보다. 내가 알 턱이 있나. 그러나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 턱 없는 도둑놈들은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심문을 이어갔다.

  이쯤 되니 도사님이 슬슬 원망스러웠다. 이런 중요한 장소에 보안장치 하나 없이 나만 덜렁 남겨두었다니. 아니지, 이런 중요한 장소니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다가 위기가 닥친 걸 보고 달려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벌써 경찰이 출동했을 수도 있다. 도둑놈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를 괴롭히다 급기야는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문제는 저희끼리 다투면서 화풀이는 나한테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는 얘기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적은 많았지만, 폭행을 당한 적은 없던 나는 눈앞에 별이 번쩍거린다는 게 뭔지를 깨달으며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도둑놈들은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일부러 뭔가를 숨긴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의 발길질에 강도가 세졌다. 나는 그저 고개를 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급기야 놈들의 입에서 그냥 죽여없애자는 말까지 나왔다. 죽이겠다는 협박이 그저 협박만은 아니었는지, 내 몸에 칼날이 들어왔다. 칼에 찔리면 아픔보다 뜨거움이 느껴지는 걸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에도 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어디선가 도사님이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줄 거라 믿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찰나였는지, 영겁이었는지…. 눈을 뜬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냥 알았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염라대왕이 앉아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좀 달랐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사후 심판을 받는 자리에 온 것이다.

  염라대왕은 내게 말했다. 살아생전 너의 죄를 고하라고. 염라대왕의 위압감은 칼을 들고 나를 위협하던 도둑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도사님의 시험에 합격해서 그의 제자가 된 후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데, 죽어버리다니. 억울했기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도사님의 제자가 되고 말겠다는 신념인지,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어 부리는 오기인지, 사실 나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죽기 직전 품었던 마음의 한이 입을 막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구슬리고 타이르던 염라대왕은 끝내 입을 열지 않는 내게 점점 화를 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불같은 분노를 터트렸다. 문자 그대로 주변이 온통 불길에 휩싸이며 칼에 찔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뜨거운 화마가 나를 덮쳤다. 염라대왕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

  “지독하구나, 이놈! 저 인간의 어미를 끌고 오너라. 너의 입을 열고야 말겠다.”

  엄마라니, 가여운 내 어미. 자식 걱정에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다 병간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앓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 그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편안한 모습으로 쉬고 계셨다. 살아생전 선하고 고운 마음으로 베푸는 삶이었기에 저리 편하게 계시는가 안도하는 순간, 어머니의 주변에 불길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어머니가 피하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시뻘건 불길은 당장 어머니를 한입에 삼킬 것처럼 커졌다. 어머니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듯했으나 입술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순간 시뻘건 불의 칼이 어머니의 두 손을 향해 내리쳐졌다.

  “엄마!”

  나는 피를 토하듯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     


  눈을 뜨니 도사님이 나를 데려갔던 온돌방에 누워있었다. 나는 그제야 가상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도사님을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환상이었는지, 제자로 삼아달라던 때부터 현실이 아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도사님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씀하셨다.

  “이래도 제자가 될 테냐?”

  환상의 여파에 숨을 고르던 나는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입을 열었으니까요. 다시 그 상황이 온다 해도 저는 또 어머니를 부르겠지요. 제자는 되지 못하겠지만, 이제는 인간답게 살아보겠습니다.”

  “네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너는 환상 속에 갇혀 끝없는 불지옥을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도사님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방안에서 나는 돈을 좇았던 내 지나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 내가 찾아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도록…      




  이 글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단편 『두자춘(杜子春)』을 패러디한 졸작이다. 종교문학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원작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임헌영의 문학과 인문학8.원숭이 재판이 이와 관련한 강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