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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Oct 25. 2019

첫 휴가의 달콤함을 기억하나요?

휴가의 의미를 곱씹어본다는 것

운이 좋게 어린 나이에 많은 도시를 경험했다.

23살, 처음으로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처음 밟아보는 머나먼 유럽 땅, 모든 게 설렘으로 가득했다.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길을 걷다 마주치는 알록달록한 건물들 앞에서 200장이 넘는 사진을 찍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밤에 무료함을 느낄 때면 문득 방에만 있는 시간이 아까워 프라하행 버스를 끊고 주말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Fail을 받지 않는 선에서 학교 수업을 자체 종강하고 크로아티아나 스페인으로 열흘 정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낯선 폴란드가 일상이 되는 순간에 지루함을 걷어주는 소중한 여행들이었다. 25살엔 미국으로 인턴십을 하기 위해 떠났다. 지금이 아니면 못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취업을 미루고 1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LA에서 4달간 영어공부를 하고 워싱턴 DC에서 6개월 동안 인턴십을 했다. LA에 있을 때에는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하며 서부의 온화한 날씨와 여유로움에 반했고, 워싱턴 DC에서 인턴십을 하면서는 뉴욕과 토론토를 여행하며 대도시의 풍족함에 매력을 느꼈다.


어느 순간 여행의 의미를 잃어갔다.

20대 초반에 유럽과 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탓인지, 이제는 여행을 하며 설렘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웬만하면 다 해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캉스나 친구들과의 짧은 모임을 선호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더라도 가까운 휴양지에서의 편안한 여행이 좋았다. 주변에 첫 유럽 여행 준비로 설레는 친구를 보고 있으면 그 감정이 문뜩 부러워지기도 했다. 여행에 대한 큰 기대가 없어도, 학기 방학이나 취업 전 단기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이 주는 여운은 처음 유럽 땅을 밟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주어지면 여행을 가는 시대니깐, 왠지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여행을 다녔다.


취업을 하니 시간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행이라는 존재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물론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쓰는 게 90년대생의 특징이라곤 하지만, MZ세대의 경계에 있는 나는, 신입사원답게 일에 좀 익숙해진 뒤 연말쯤에나 휴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날씨가 좋은 5월쯤에도 휴가를 쓸 순 있었지만 그만큼 여행이 절실하지 않았다. 회사에 적응하고, 월급을 받는 새로운 기쁨을 느끼다 보니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고, 어느새 일을 시작한 지도 10달 정도가 흘렀다.


드디어 첫 휴가.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정했는데, 특별히 러시아가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저렴한 항공권을 찾다가 가게 됐다. 미국 인턴을 같이 했던 친구와 둘이 다녀왔는데, 비행기를 결제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블라디보스톡이 소위 '노잼 도시'로 유명했기 때문에 황금 같은 휴가를 할 일 없이 보낼까 봐 걱정이 됐다. 블로그에 여행후기를 찾아봐도 바람이 쌩쌩부는 부둣가 사진이나 사람이 거의 없는 길거리 사진들이 많아서, 정말 조용한 도시겠다는 예상을 하고 떠났다.


웬걸, 블라디보스톡 여행은 최고였다.

걱정과 달리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다녀온 뒤 한 달간은 계속 생각이 날 정도로 긴 여운을 남기는 여행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니 친구들로부터 DM이 왔다.

블라디보스톡 추천이야?
너처럼 블라디보스톡 좋아하는 사람 처음 봐!

나처럼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보며, 너무너무 좋은 도시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완전 추천!!'이라고 답을 쓰면서도 멈칫, 망설여졌다.


왜 그렇게 좋았지?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밤 비행기였기에 첫날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었고, 알람 없이 잠에 들어 늦은 오후 2시쯤 눈 비비며 외출 준비를 했다. 여행 가서 이렇게 설렘 없이 늦잠을 자는 사람은 우리뿐일 것이라며 미국을 다녀왔더니 이제 여행이 시시한가 보다 너스레를 떨며 퉁퉁 부은 얼굴로 숙소를 나섰다. 맛있다는 해산물 레스토랑에 가서 대게도 먹고 말로만 듣던 곰새우도 맛봤다. 저렴한 물가와 싱싱한 해산물에 여행 내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우리는 해산물을 고기보다 좋아하는 유형이라 대게를 한 사람당 1kg씩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이곳은 천국 같았다. 내일은 뭐할까 고민하며 즉흥적으로 스케줄을 만들어나갔는데, 급하게 짠 계획치 고는 생전 처음 발레 공연도 보고 러시아식 사우나인 반야도 체험하며 알차게 보냈다. 4박 5일간의 코스들을 생각하며 어떤 점이 좋았고 추천할 만 한지 곰곰이 생각했다. 음식도 맛있었고 내가 즐겼던 콘텐츠들도 좋았다.


하지만 진짜 좋았던 건 내 마음이었다.

여행지를 단순히 비교할 순 없지만, 프랑스 파리 여행처럼 볼거리가 풍성하고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매력적인 것들은 없었다. 아직도 파리 에펠탑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하는데 거대한 에펠탑이 내 시야에 잡히던 순간, 나는 이것이 벽지인지 디지털 홀로그램인지, 진짜 에펠탑을 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는데 3초가 걸렸고, 현실임을 인지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국에서 홀슈스밴드를 처음 본 순간도 생생한데, 말굽모양으로 깎아져 형성된 절벽을 보면서 느꼈던 자연의 웅장함은 내 존재에 대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블라디보스톡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휴가라서 좋았다. 직장인의 휴가라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번 여행이 이토록 소중하고 긴 여운을 남긴 것은, 이것이 꿀 같은 휴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며 주어진 길었던 빈 시간들이 아니라 빽빽한 직장 생활 속 잠깐 남겨진 휴가라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대학시절 여행은 설렘은 가득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놀다가 취업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시간 아까운 고민들을 반복했었다. 언제 하루는 미국에서 인턴을 하며, 내가 취업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닌지, 미국 인턴이 정말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 걱정이 되어 취업한 선배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좋은 곳에서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취업이라는 부담감은 미국에서 넷플릭스를 볼 때에도,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영어자막으로 설정해서 재미를 반감시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회사원으로서 주어진 휴가는 새로운 감정을 선사했다. 아직 10개월밖에 하지 않았지만 벌써 지겨워진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현실에서 떨어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그 감정이 참 좋았다.

신입으로서 늘 가지고 있던 긴장감과 쌓였던 스트레스가 있었기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안정적인 삶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서 평온하게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 휴가가 지나가면 언제 또 이런 여유가 찾아올지 모르기에 모든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직장인에게 휴가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그토록 갈구하던 많은 시간들을 얻게 되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불안이 자리 잡을 테니 말이다. 휴가의 의미를 고민해 보는 것, 예전에도 주어졌을 3박 4일이 왜 지금 이리 특별한지 곱씹어 보는 것,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회사생활을 더 의미 있고 풍족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아무도 없는 니콜라이 황태자 개선문 앞에서 춤을 추며 깔깔대던 우리의 모습

알람 없이 햇살에 눈을 떠 '오늘은 어떤 여행을 할지' 고민하던 시간

강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직장생활은 어떻게 흘러갈지 고민을 나누던 순간

그리고 우리가 휴가라는 사실에 마음껏 행복해하던 모습의 잔상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처음 느껴본 직장인의 휴가는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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