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담함이 생기기까지
신입사원의 점심식사는 일의 연장이다.
보통 점심시간은 팀원들과 다 같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대리부터 과장, 팀장까지 다양한 연차의 팀원들이 함께한다. 오전 업무를 끝낼 때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미어캣처럼 눈치를 살피고, 식사를 하면서도 중간중간 숨 막히는 침묵을 참을 수 없어서 시시콜콜한 주제들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팀 내에서 애써 신입의 젊은 발랄함을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던 어느 날 입사 3년 차 대리님과 단 둘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평소에 친근하게 느꼈던 대리님이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컸기에 다른 날과 달리 기대되는 점심시간이었다. 대리님은 빈약한 구내식당을 벗어나 시내의 음식점에서 맛있는 짬뽕을 사주셨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으며 평소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배부르게 점심을 얻어먹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팀장님과의 식사라면 디저트까지 얻어먹겠지만, 3년 차 대리님과의 식사에서는 왠지 모르게 식후 커피는 내가 사고 싶었다. 시작은 패기롭고 좋았다. 눈치 있고 센스 있는 후배가 된 기분도 들었다. 아니라며 커피까지 사주시려는 걸 만류하고 스타벅스 어플을 켜고 사이렌오더로 주문을 넣았다.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해서 대학생 때부터 애용해 온 골드회원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주문대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자리를 잡고 사이렌오더를 시키는 곤 했기에, 온라인 어플을 통한 주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짬뽕집에서 나와 빠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 한 뒤 천천히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대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역시 회사원들은 식후 커피를 끊을 수 없나 보다 생각과 동시에 그 대열에 내가 껴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감격스러웠다. 스타벅스를 도서관삼아 자소서를 쓰던 암울했던 취준생 시절의 내가 잠시 스쳐 지나갈 때쯤 주문한 커피가 모두 준비됐다는 앱 푸시를 받았다.
"커피 나왔네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싱글벙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달음에 픽업대로 갔는데, 커피가 없었다. 아니, 커피는 있었는데 '유월' 닉네임이 붙은 커피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대리님 생각에 다급하게 점원에게 주문서를 보여주며 빨리 달라는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점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주문이 누락되어 죄송하다는 말이 아닌, 이 지점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오 마이 갓.
"고객님, 여기는 종로 3각점이 아니라 종각점입니다."
아득해졌다. 망했다. 창피한 마음에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1시간이라는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잘못 주문한 매장으로 옮겨갈 수도 없었다. 돈을 버려서 속상한 마음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빈손으로 대리님께 돌아갈지 민망한 감정으로 가슴이 아렸다. 친구들 앞에서 꽈당 넘어졌을 때 무릎의 통증은 느낄새 없이 창피함으로 얼굴만 시뻘게졌던 그때처럼 말이다.
유월님! 커피는요?
아 그게... 그... 커피가 없어요.. 아니 그 없는 게 아니라.. 잘못시켰어요.. 여기 매장이 아니라...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마지막에 어느 지점으로 잘못시켰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 없이 텁텁한 상태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대리님은 거듭 괜찮다고 되려 나를 위로해줬다. 마음만 받은 걸로 하겠다 하셨지만 커피 한 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 그것도 바보같이 주문을 잘못한 것, 너무나 멍청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내가 미워졌다. 괜히 사겠다고 나대지나 말걸. 그냥 커피까지 얻어먹었다면 염치는 없었어도 오른손에 커피는 있었을 것 아닌가.
신입사원의 하루에는 1일 1 실수가 기본이다.
커피를 잘못 주문하는 이런 일상적인 실수 외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을 신입사원 때는 저지른다. 심지어 가장 편하다고 느낀 3년 차 대리님과의 식사에서도 긴장해서 실수를 하는데, 업무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실수가 일어나겠는가. 본부 전체에 돌리는 메일을 작성하다가 클릭 실수로 제목도 없고 내용도 미완성된 채로 전송하기를 눌러버린 적도 있고, 협력사와 메일을 주고받을 때 상대의 회사 이름을 바꿔 보낸 적도 있다. 보안문서를 풀지 않고 전송하여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하기도 한다. 몰랐던 부분에서 실수가 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번 실수했던 것을 또다시 한다거나, 선임에게 지적받았던 것을 또다시 잘못했을 때에는 '아, 역시 나는 회사와 맞지 않나 보다' 수십 번 생각하며 쓰디쓴 퇴근길을 겪곤 했다.
1일 1 실수를 쌓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경력 3년을 가득 채워가는 지금도 실수는 일어난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실수를 통해 두 가지는 확실히 얻었다. 첫 번째는 '경험치'이다. 실수를 하다 보면 실력이 늘어난다. 대부분의 실수는 1회만으로 교정이 가능하다. 실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이 신입사원에게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응용 가능한 부분도 있어서, 하나의 실수로 둘을 얻어가는 경우도 생긴다. 실수가 남겨준 강력한 기억들 위로 실력이 쌓였다. 두 번째는 '담력'이다. 실수를 하고 수습하는 수십 번의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이 단단해진다. 처음에는 커피 주문하기와 같이 전혀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에서 잘못을 해도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첨부파일 없이 본부 전체 메일을 잘못 보내는 실수를 하더라도, 태연하게 '메일 재첨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침착하게 다시 메일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실수가 더 쌓이다 보면, 업무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도, 차가운 머리로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 여유도 생긴다. 신입시절이라면 '어떡해, 어떡해!'라는 가슴속 정신없는 외침 때문에 뇌가 멈춰버렸을 텐데 말이다.
뭐 어때용?
실수해도 이렇게 대담해지다니. 생각보다 내 실수 하나로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