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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Nov 17. 2019

회사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

'부탁드립니다'의 진정한 의미

"아~ 이거 전에 알려줬던 건데"

신입사원 때 가장 듣기 무서워했던 말이었다. 대리님 혹은 과장님께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이런 표현이 붙으면 나는 거기에 쓸데없이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미 알려줬던 내용인데, 이걸 한 번에 숙지하지 못하고 또 물어보다니. 이걸 알려주기 위해 내 바쁜 시간을 또 써야 해.

지금 생각해보면, 내 질문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의도치 않게 나온 말이거나, 단순히 전에 알려줬던 내용임을 언급한 것이거나, 또는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어렵지 않은 내용일 것이라고 미리 넌지시 말하고 설명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벼운 한마디에 신입의 새가슴은 한순간에 쪼그라든다. 지금은 '이거 전에 말했던 건데'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도를 오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사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회사에서는 갑이되기도 을이 되기도 한다.

신입사원으로 제일 처음 메인으로 맡았던 일은 쇼핑 플랫폼에 우리 상품들을 판매하는 제휴업무였다. 쇼핑 플랫폼에 노출이 많이 되어야 매출이 높게 나오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가 아닌 우리 쪽에서 부탁할 일이 많은 제휴였다. 작은 것 하나 요청할 때에도 '부탁드립니다:)'를 남발하며 최대한 공손하게 메일을 보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회신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단호하게 거절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반대로, 제휴처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요청은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휴무라서, 퇴근 시간이 지나서 어렵다는 말은 통하지 않고, '못해주시면 상품 빼겠다'는 반협박성 말들이 부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철저히 갑과 을의 위치에서 제휴를 맺은 우리는 '부탁'이라는 표현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


업무 갑질은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한솥밥을 먹는 같은 회사 직원들끼리도 서로에게 갑질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루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 개발자에게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공손히 끝낸 나의 말을 그는 정말 ‘부탁’으로 인식한듯했다. 기분 좋으면 해 주고, 귀찮으면 안 해주는 부탁 정도. 아무런 노티도 주지 않아 며칠 뒤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앞서 요청드린 내용에 확인을 부탁했더니, 또다시 부탁으로 인지했는지, 성의 없이 '확인 중'이라는 무성의한 대답만 돌아왔다. 어떠한 업무를 요청하는 입장과 그 업무를 처리해주는 입장 사이에서는 이런 갑질이 흔하게 일어난다. 업무용으로 정당하게 사용한 금액을 재무팀에 요청할 때에도, 왠지 용돈을 받는 것처럼 나는 겸손해지고 재무팀은 자신의 돈으로 착각했는지 까칠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상품의 제휴를 담당하기 때문에, 영업부서로부터 '부탁드립니다' 하는 메시지가 많이 왔다. 하루는 너무 바빠서 점심을 포기한 채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본 적이 있는데 메신저 하나가 왔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영업팀 김 아무개인데요, 점심시간에 너무 죄송한데 급한 일이라서 연락드렸습니다. 메일 드린 업무 요청 건 빠른 처리 부탁드립니다^^

너무 바빠서 메신저를 안읽씹 상태로 두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급한 건이니 빠르게 처리해달라는 전화였다. 인내심이 바닥이 나있던 터라 정색을 하며 '네, 근데 이런 요청은 미리 좀 부탁드릴게요.' 답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분명 짜증을 낸 것은 나였는데 다시 메신저가 왔다.

급하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미리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의 메신저를 본 순간, 그동안 내가 증오했던 갑질 사원의 모습을 나에게서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게 업무 요청을 한 그도, 그것을 처리하는 나도 같은 회사원일 뿐이다. 그 또한 미리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점심시간임에도 무례함을 무릅쓰고 메신저를 보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무시한 채 나는 나만 생각했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대응이었다. 점심시간에 업무를 요청한 그의 메신저보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나의 답장이 훨씬 무례했다. 내가 사용한 '부탁드립니다'는 표현은 내 감정을 드러내는 공격의 수단일 뿐이었다.


부탁한다는 말의 의미는 요청의 의미이다.

친구 사이에 도움을 구하는 그런 부탁이 아니라 업무를 요청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해야 할 당연한 업무를 요청하는 것이지만 지시하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들릴까 봐 에둘러 부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해주세요.'라는 지시적 언어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말하기 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회사 언어의 의미를 파악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부탁이라는 단어로 업무 요청을 받았을 때, 갑질 하지 않고 예의 바른 태도로 요청 온 업무를 처리할 수 있고 내 감정을 부탁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누군가를 공격하지도 않을 수 있다. 회사를 다닐수록 친절함을 잃어간다는 농담을 주고받는데, 바쁘고 여기저기에 치이는 전쟁 같은 회사 안에서 남의 상황과 감정까지 헤아리며 친절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쁘다고, 연차가 쌓였다고 무례해지기 십상이다. 부탁이라는 단어 외에도 우리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통용되는 말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아, 모두가 깨우치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회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런 작은 하나하나의 배움이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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