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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Oct 24. 2021

워라벨, 진짜 좋은 건가?

퇴근이 곧 워라벨은 아니다

행복한 고민을 했다.

빛이 보이지 않던 터널 같던 취준생 시절은 무려 세 군데의 회사에 합격하며 끝이 났다. 한 군데는 고민도 없이 선택지에서 지웠고, A와 B회사 중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A회사는 유망한 데이터를 다루는 직종에 연봉도 매우 높았다. B회사는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9시 출근-5시 퇴근이라는 강점이 있었다. A회사는 B회사보다 연봉이 1천만 원 정도 더 높았다. 학교 동기들은 모두 A회사를 가라고 했다. 조금 더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고, B회사 못지않게 분위기나 복지가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직무는 두 회사 모두 만족스러웠기에, 나의 최종 결론은 연봉이냐 워라벨이냐로 단순해졌다. 결국 5시에 퇴근하는 회사를 선택했다.


퇴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길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퇴근 시간 하나로 집중되어 있었다. 천만 원이라는 기회비용 탓일까, 나는 꼭 5시에 퇴근해야 했고 야근은 절대로 하기 싫은 것이었으며 퇴근 후 시간은 누가 봐도 보람차야 했다. 그렇게 나는 입사할 때부터 워라벨에 집착했다. 일을 하다가도 4시 40분이 넘어가면 정리할 궁리를 시작했고 할 일이 남았더라도 급하지 않은 업무는 다음날로 미루고 퇴근했다. 퇴근 후 나는 두 번째 하루를 사는 마음으로 알차게 보냈다. 베이킹 클래스, 가죽케이스 만들기, 도자기 만들기 등 각종 원데이 클래스를 섭렵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저렴하게 열리는 댄스강좌도 들었다. 운동도 필라테스, 헬스, 수영 등 골고루 돌아가며 했고, 친구와 유튜브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게 좋았다.

사실 처음 회사에 합격할 때에는 연봉이 높은 친구를 부러워하고, 그런 친구들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같은 직장인일 뿐이라 야근 없는 삶이 최고다. 5시에 퇴근해서 1시간 거리의 친구 회사 앞까지 가서 커피 한잔하며 친구의 퇴근을 기다리는 여유, 나는 그 여유도 좋았지만,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의 시선이 더 좋았다. 인스타그램에 퇴근 후의 삶을 신나게 자랑하며 동네방네 워라벨 최고인 회사에 다니는 내 모습을 알렸다. 1년 동안 야근을 한 적이 한 손에 꼽는다며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했는데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 속에 나의 워라벨 사랑은 더 맹목적으로 깊어졌다.


워라벨은 일과 삶을 대립시켰다.

한국에서 워라벨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된 것은, 저녁이 없는 삶이 보편적이었던 한국 직장인의 슬픔 때문일 것이다. 일과 삶을 구분 짓고 퇴근 후의 시간도 소중하게 보내는 삶,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들과 퇴근 후 시간을 조금 더 같이 보내는 삶, 부와 명예에 가려져있던 이러한 가치들을 사람들이 중요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일과 삶을 절대적인 시간으로써 구분 짓고 있었다. 5시를 기점으로 종이 접듯 두 삶을 대치시켰다. 어느 순간, 업무에 대한 열정은 사라져 버렸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업무시간은 그저 퇴근 전의 삶에 불과했고, 마치 퇴근 후의 삶이 진짜 나의 인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밸런스의 의미를 고민했다.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던 1년 차 말미에 이러한 소진이 나의 워라벨 집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일과 생활을 시소게임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나를 택해 플러스가 되면 다른 것이 마이너스가 되는 거래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내 시소는 가파르게 기울어져있었다. 나의 문제를 알게 된 이후로는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업무를 할 때, 조금 더 배우고 싶은 업무가 있다면 4 시건 5 시건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몰두했다. 광고를 집행하는 업무를 할 때, 업무 시간 외 광고가 정상적으로 라이브 되고 있는지 확인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 업무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황금 같은 휴가 시간을 빼앗는 짜증 나는 일 정도로 치부했다면, 이제는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뉴스 기사를 보다가 다른 광고들을 보며 나의 업무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하면서 life 속에서 만나는 work를 더 이상 침입자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내 안의 몰입감과 일에 대한 재미가 조금씩 되살아났다. 일과 삶을 조금씩 섞어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블랜딩, 워라블이다.

이런 생각들이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는지, 벌써 워라블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일과 삶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블랜딩 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가치관이 워라벨에서 워라블로 옮겨갔다는 것, 이 변화는 나의 업무에 대한 성취감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었다. 퇴근을 기점으로 일과 삶이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일과 삶 둘 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혹시 절대적인 시간으로 이 둘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린 모두 지향하는 가치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블랜딩 한다는 워딩에 거부감을 갖고 철저한 구분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할 생각이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왜 그런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워라벨을 중시하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일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이유를 고민하다 워라벨에 대한 집착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집착은 친구들을 의식하는 나의 모습과 회사 선택의 기회비용을 무마하려는 내면적인 욕구가 있었음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를 알고 일을 대하는 나만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내게 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워라벨의 Balance는 절대적인 시간에 있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몰입감과 만족도, 즉 질적인 균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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