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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연수 Oct 27. 2021

걷기 in 서울 3

함녕전

어머니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평소에도 심장이 약했는데 드디어 버티지 못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 치료차 평소처럼 들른 병원에서 몸이 이상해서 진찰을 받았는데 심장전문병원으로 바로 인계되어 수술을 해야 한단다.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신지 벌써 35년째인데 그동안 그 작은 몸의 심장이 용케 버텨오다가 드디어 한계치에 와닿았버렸나 보다.  어머니는 심장전문병원으로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각각 입원을 하셨다.  두분 병원에 보내드리고 집주인들이 떠나버린 아파트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다.  


정신도 많이 혼미해 지셨고 간병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벌써 요양병원으로 모셨어야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지금까지 힘들게 힘들게 집에서 지내시다가 드디어 이번에 요양병원으로 가셨다.  

간병에 몸을 상해버린 어머니가 치료후에 돌아오더라도, 이제 아버지는 남은 생을 요양병원에서 보내셔야만 하겠지’.

아버지가 낡아버린 몸으로 지겨운 세상 견디어 가는 모습을 볼때면 애잔한 마음과 함께 사는게 참 구차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이곳에 있을때도 두사람의 작은 몸에 비해서 이 집이 너무 크고 빈공간이 넓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두 사람마저 떠나버린 이 공간은 횡하다.  그래도 빈공간들에는 아버지의 잔영들이 보인다.  아버지가 누워지내시던 침대, 휠체어, 언젠가부터는 말을 하는 방법도 잊어 먹어버렸는지 무덤 같은 침묵속에 바깥만 무심히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그 공간.  무엇보다 그의 냄새..


이 공간을 차지하던 주인들은 이미 떠나버렸지만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 그 자리, 그리고 이 집의 곳곳에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와 기억이 여전히 상주하고 있다.


광명문

“만물에서 으뜸이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


함녕전은 고종이 기거하던 침전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던 고종이 1897년에 경운궁으로 이어하기 위해 지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옆에는 1895년에 일제에 의해 왕비를 위한 혼전을 지었다.  명성황후의 빈전은 경효전이었는데, 이는 시왕(時王)의 침전 곁에 혼전을 세운 유례없는 배치형식이다.  지금의 함녕전은 1904년 화재로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며, 고종은 퇴위 후에도 여전히 이곳을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1919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고종 사후에는 빈전,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1901년 7월 황태자 (순종)가 고종의 오순을 경하하며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장면이 [신축진연도병]으로 남아 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가 함녕전의 아궁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함녕전 온돌을 수리하고 이를 말리기 위해 지핀 불로 화재가 났고, 불길이 주위로 번지면서 함녕전을 포함해 경운궁 일대가 모두 소실됐다. 지금 건물은 같은 해 중건하여 1905년 1월에 상량한 것이다.


함녕전은 “ㄴ” 자형 평면을 하였으며, 몸채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고, 서쪽 뒤편으로 4칸이 덧붙여 있다.  몸채는 중앙에 대청을 두고, 이 좌우에 온돌방, 또 그 옆으로 누마루를 두었는데, 동쪽은 고종의 침실, 서쪽은 내전 침실이었다.  기단 위에 전달을 깔고 사각 주춧돌을 놓은 다음 사각기둥을 세워 벽체를 구성했으며, 외벽은 띠살창호를 달았다.  함녕전은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된 부재를 놓아 끝머리가 초각된 보머리를 받치게 한 몰익공 건물로서,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함녕전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惟賢門)과 장식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에서 해설을 시작할 때부터 불우했던 조선왕조의 마지막를 함께한 이 궁궐에 대한 회한과 정한을 토로하던 우리 예쁜 해설선생님은 결국 함녕전에 도착하자 일제에 대한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일상생활도 하고 잠을 자는 침전으로 사용된 곳으로 고종황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의 하나입니다.  또한 1904년 4월, 덕수궁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대화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 대화재를 전한 <전시화보> 등 일본 측 언론에 의하면 “고종의 거처인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불을 잘못 때어 나무기둥에 불이 옮겨 붙었고 삽시간에 급한 동북풍을 타고 궁 전체로 번져 하늘이 새카맣게 변했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돌의 구조상 아무리 과열되었다고 해도 기둥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혹이 있고 일제의 의한 방화가 의심됩니다.

심지어 그때의 사진자료를 보면 궁궐을 둘러싼 일본군인들이 궁궐이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아궁이 구조를 보십시오.  어떻게 저렇게 안쪽에서 바람에 의해서 불길이 바깥으로 번질 수가 있겠습니까?”


듣고 있다가 내가 만약 일본인 관광객에게 여기를 설명하게 되면 어떻게 이야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불을 질러서 우리 황제를 죽이려 하고 조선을 집어삼키고 36년간 식민지 인민들에게 온갖 수탈을 자행한 당신들 조상들의 행위를 반성해야만 합니다.” 라고 호통을 쳐야 할까..  음..


‘이미 러시아와 조선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전을 치루고 있던 일본이 조선인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게 뻔한데 왜 갑자기 조선의 궁궐을 불을 질렀을까..  그렇게 많이 고종이 미웠나..’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나서 조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는 커녕 조선의 반발과 역시 일본이 개화를 했다해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여전히 야만적이라고 협력관계였던 국가들로 부터까지 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 일본제국주의 정부가 다시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두고 그들이 가장 경계하던 다른 열강들의 조선반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그런 빌미를 줄 행동을 했을리가..’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를 두고 다른 자료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해설선생님 말처럼 화재 당시 일본군이 덕수궁 주위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덕수궁 주위로 불을 끄기 위해서 투입된 병력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덕수궁 주위에 있던 각국 공사관의 대부분 병력들을 달려와 있었다.  그들 여기 덕수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깥에서 대기만해야 했던 이유는 궁궐의 문이 잠겨 있었고 궁궐수비대가 일본군을 비롯한 다른 공사관 경비병력의 진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조선은 궁궐에 불이나면 반란이나 역모로 인한 경우로 판단을 해서 궁궐안의 인원에게 절대로 고함을 치게 하지 않고 궁궐의 문을 굳게 잠가서 바깥의 인원이 궁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사실은 덕수궁의 화재를 두고 미국 등의 신문에서 주로 나타나는 기사이다.

그리고 지금 보아서는 어떻게 저렇게 깊은 구들에 불씨가 바깥으로 번져나와서 바깥 건물 기둥에 불을 붙일수 있을 까 하는 의문도 기사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다.  


그때 함녕전은 대대적인 수리를 했고 불이나던 그날은 수리 후 처음으로 불을 짚힌 날이었다.  한동안 불을 때지 않는 집이라 평소보다 많은 땔감을 밀어넣고 불을 지폈다.   불행히도 공사가 끝난 후에 함녕전 주변으로 많은 톱밥이 널려 있었고 기둥과 처마에는 단청을 새로 칠한 상태여서 톱밥에 옮겨 붙은 불씨가 강한 바람에 날려 기둥이나 처마에 쉽게 옮겨 붙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의 궁궐 건물의 아궁이 구조는 함녕전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구들에서 시작된 불로 궁이 타버리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발생했고 덕수궁의 경우는 얼마전에도 선원전 영역과 수옥헌 영역(중명전) 영역에서 화재가 있었다.


물론 일본제국정부가 무언가의 필요에 의해서 불을 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궁궐에 불을 질러 타죽기를 바랐을 만큼 고종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재위 후에 늘 외세에 의존해서 자신의 집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고종은 별 다른 저항없이 날것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덕수궁의 화재원인을 전적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동기가 별로 없다.


일본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 나루호도(なるほど、역시)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1904년 덕수궁의 대화재는 일본인들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철석처럼 믿고 있는 역사에 관심있는 한국인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음.. 저놈이..’  익히 짐작이 된다.

제반 사항을 곰곰이 따져보고 앞뒤를 재면서 벌써 100년도 넘게 지나버린 그때의 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가해자인 일본인들은 그들의 기억속에서 조차 희미해져버렸겠지만, 피해자인 우리 마음은 웬만해서는 잊을 수가 없다. 오히려 덕수궁에 올때면 새록새록 더 새롭기만 하다.

함녕전 영역

궁궐들에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이라는 역사에 입힌 상처와 그 생채기의 흔적을 되새기는 후손들의 울분과 적개심이 곳곳에 서려 있다.

명성왕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의 건청궁, 한일합방의 장소 창덕궁의 대조전 옆 흥복헌,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손들이 쓸쓸히 살다간 낙선재,  을사늑약의 장소인 덕수궁의 중명전,  고종이 일제치하에서 마지막까지 살다간 이곳 함녕전. 궁궐의 곳곳이 슬펐던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아직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행이든 사업이든 학업이든 쇼핑이든, 대한민국을 찾은 오늘날의 일본인,  그중에 특히 조선의 역사 현장인 궁궐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다른 나라와 민족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합병하고 그나라 민중들을 몇십년간이나 핍박한 그들 선조의 잘못을 준엄히 꾸짖고, 너희 정치인들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니 니들이라도 대신 사과하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님 냉정하게 당시 국제 역학상,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지 못했으면 어차피 조선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거나,  그도 아니면 제국주의에게 혹독한 학습을 받고 있던 중국, 청나라에게 그들이 서구열강에 당하면서 배웠던 방법으로 우리도 그들에게 당했을거다.  고 이야기해야 할까.


“여기 함녕전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황제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아관파천, 즉 망명) 이후에 경운궁 (이후 덕수궁으로 개칭)으로 돌아오신 후 주로 생활을 하시던 전각입니다.   황제의 침전과 내전 그리고 귀빈 방문시에 접객을 위한 장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옆으로 보이는 건물은 덕홍전인데 덕홍전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경효전이라는 이름이었고 그때 저 건물의 용도는 일제의 의해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혼을 모시는 혼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저 건물은 당초에 고종께서 경운궁으로 오신 후에 경복궁에 있던 황비의 혼전건물을 이곳으로 이건해서 자신의 침전 바로 옆에 황비의 혼전을 두고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건물 배치는 조선역사를 통틀어서 유일한 경우인데 고종황제에게 있어서 명성황후 민씨는 그만큼 특별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황비가 살해를 당했다는 것을 매일 같이 되새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명성황후 민씨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했다는 점에서 여느 선대 조선 왕비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철종 사후 새로운 임금이 되기에는 서열상 많은 한계를 가졌던 고종을 임금으로 만든이가 아버지 대원군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던 대원군은 그의 최후까지 고종 황제의 가장 강한 정적의 위치에 존재 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항을 하면서 일본을 위시해서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서방제국주의 세력, 조선의 전통적 종주국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청나라, 지난 오백년간 성리학에 기반을 둔 나라의 오래된 통치시스템이 새로운 시대에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동학전쟁으로 대표되는 민란 등.  이와같은 안팎의 강한 도전에서 끝내 전통적인 왕권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이 유일하게 신뢰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 명성황후 민씨였습니다.  명성황후 민씨는 총명하고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특히 역사서를 읽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고종이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던 대원군과 그의 지지세력을 제어해 나가는 데는 그녀의 역사책 읽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1919년에 68세의 나이로 승하를 합니다.  아관파천(1896년~1897년)을 기준으로 그 후 22년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중간에 대화재때는 몇년간 벽돌식 건물은 중명전에서 기거를 하셨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곳에서 생활을 하십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거세당한채 한일합방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던 그에 비해 역사적인 의미에서 직접적인 통치행위를 했었고, 안팍의 강력한 도전에 끝까지 저항과 타협을 인물인 고종이 실질적인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습니다.  풍전등화 같았던 20세기 초 조선의 상황, 그 모습 그 자체가 바로 고종의 모습이었습니다.  끝끝내 선대로 부터 물려받은 왕권과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만년에 자신의 처지와 실패를 곱씹으면서 쓸쓸히 살다간 곳이 바로 이곳 함녕전입니다.   

몇년전에 새롭게 단장을 해서 지금을 단청이나 내전의 장식이 곱게 보입니다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참 씁쓸한 장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종 사진


사람이 삶을 마감하고 떠나버린 자리에는 남은 그에 대한 기억들과 그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베어 있다.  100여년간을 서 있는 저 나무 기둥의 우리 노친네 피부거죽 같은 나뭇의 살결과 아픈 생채기, 너무 고와서 처연한 띠살무늬 창문에는 자신의 왕비 그리고 나라를 잃고 억울함과 한스러움을 곱씹으며 죽지못하고 살아가야만 했던 고종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베어있다.


산을 배경으로 하는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은 주위가 주변의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다.  예전 덕수궁 주변은 서양열강들의 공사관들, 서양인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 그들의 집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함녕전 마당에서 쳐다보는 바깥의 빌딩들은 답답하기만 한데 정작 집주인인 고종은 궁궐 옆으로 다닥다닥은 붙은 외국 공사관들이 자신을 적으로 부터 지켜줄 구원자로 여겼나 보다.


함녕전에는 이곳에서 살다간 고종 황제의 냄새가 난다.  치욕스럽고 분한 마음으로 하염없이 궁궐을 바깥을 쳐다보았을 그의 낡은 곤룡포 자락에서 ‘안타까움’과 ‘쓸씁함’이라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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