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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산 Jun 01. 2023

나의 녹내장 일기

#1 : 잠식, 대피, 지킨다.

나는 지금 오른쪽 눈을 실명한 상태다.

처음 녹내장 진단을 받은 건 20살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라식 수술을 받기 위해 들른 안과에서였다. 사촌이 간호사로 근무하는 안과였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형식적인 검사를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슬며시 내게 정밀검진을 권하였고, 그 결과 오른쪽 눈 상당부분의 시야가 이미 상실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내장이 무서운 이유는 스스로가 그 병의 진행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녹내장 환자 대부분이 시야의 상당부분을 잃고나서야 병원을 방문하게 된다. 이미 손실된 시신경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되살릴 수 없고, 애초에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어서, 평생 동안 조금씩 시야를 잃어가게 된다.

그런 면에선 나의 사춘기 끝물의 허영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만약 검진과 관리를 받지 않고 20대를 보냈다면 지금쯤 양쪽 눈을 모두 잃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대학생이 되어 멋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들른 안과에서 그나마 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이후 20살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군대 신체검사를 가게 되었고, 군면제를 받게 되었다. 그때 내게 '6급 병역면제'라고 적힌 서류를 건네던 담당자의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잘 관리하라고 빼주는 거야."

그가 그저 기준과 규정에 의거해서 결정을 내렸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시혜적인 태도가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지만, 그땐 나도 그렇게 다짐했던 것 같다. 잘 관리해보자고.


그렇게 하루에 4번씩 안압조절을 위한 안약을 넣으며 관리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결국 오른쪽 눈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내가 3개월마다 들르는 대학병원 의사의 말로는 눈은 나쁜쪽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왼쪽 눈을 지키는 싸움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지킨다, 3개월마다 조금씩 나빠지는 경과를 확인하고 병원 정문을 빠져나올 때마다 나는 그말을 되내인다. 지킨다.


녹내장에는 3대 금기가 있는데, 바로 커피와 담배와 수면부족이다. 나는 20살의 초입에서 이 녹내장을 조우하게 되었고, 이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소설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대학교에 입학한 후 꽤 오랜시간 담배를 피웠다. 글을 쓰면서 늘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22살이 되던 무렵에 여자친구로부터 '담배 안 끊으면 끝.'이라는 통보를 들은 후로 금연을 할 수 있었다.(그렇다. 은인이다.)


문득 오늘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봤다. 아마 북한에서 쐈다는 미사일 때문인 것 같다.

새벽 6시, 휴대폰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리며 대피하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그때 내가 거의 본능적으로 제일 먼저 챙긴 물건이 바로 녹내장 안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 이 놈의 병과 거의 한 몸이 된 셈이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녹내장이 나의 삶의 상당부분을 잠식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제 안약이 없으면 지독하게 시려오는 눈의 통증을 버틸수도 없다. 그렇지만 때때로 소중한 것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도 이 병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것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애정하고 싶어진다.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이 한정적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이 병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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