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실제 판결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된 창작물입니다. 다만, 전개를 위해 등장인물, 사실관계, 사건 세부 내용은 작가의 상상에 따라 허구로 구성되었습니다.
본 작품의 기초가 된 판결에 등장하는 고인과 유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스물네 살 공장 일을 시작했다.
일찍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로 나를 키운 어머니는 나의 취업을 그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 공장 기계 앞에 섰을 때 만해도 16년 넘는 시간을 공장 안에서 보내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피자 소스 원료를 배합하는 공장을 시작으로 빵 만드는 공장, 물건을 포장하는 공장까지 짧게는 3개월 많게는 1년이 넘게 공장 여기저기에서 생산직으로 일했다. 대다수 경력이 조금씩 쌓이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고되고 위험하지만, 연봉이 높고, 고용이 안정적인 사업장으로 옮겨 갔다.
나 역시 그러했다.
34도를 웃도는 더위가 유난히 맹렬하던 여름날, 함께 여러 공장에서 일하다 몇 달 전 반도체 공장으로 이직한 선배 A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힘이 느껴졌고 밝아 보였다. 반도체 공장은 괜찮냐는 내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연마하고 세정하는 곳이야. 위치가 너희 집 근처라 출퇴근도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지금 있는 빵 공장보다 연봉도 높고 정규직이라는 것이 제일 큰 장점이야. 그런데 2조 2교대라 야간에도 일해야 하고, 대부분 오래 일하다 보니 텃세가 있다는 것은 좀 단점이고... 그래도 너야 선배들한테 워낙 잘하잖아. 나도 있고. 이제 지긋지긋한 빵 공장은 그만하고 여기로 와라. 가을에 직원 모집한다는 이야기 해주려 전화했어. 건너 들었는데 이제 곧 첫째도 태어난다며…. 축하한다."
선배 말처럼 올해 12월이 되면 아내 수정이의 배 안에 있는 아이 동글이가 태어날 것이었다. 아내 수정은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오랫동안 다녔던 빵 공장을 그만두었다. 배 속에 있는 동글이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니 가능한 안정 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배를 보듬으며 아기에게 동요를 불러주는 아내 수정을 보니 더 일찍 공장을 그만두지 못했던 우리의 상황이 씁쓸하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설렘과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은 가장이 된다는 무거움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를 혼자 키워낸 어머니가 짊어졌던 그 무게.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 일을 한다는 것은 ‘먹고 산다’라는 네 글자와 달리 결코 가벼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 무게 때문이라도 좀 더 안정적이고 연봉이 높은 곳을 찾아 떠나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일했다는 전 공장에서 받은 평가 덕분이었는지, 그해 늦여름 반도체 공장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웨이퍼를 랩핑하고 웨이퍼 열처리 공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웨이퍼란 반도체 소자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얇고 평평한 원형 판을 말한다. 랩핑 장비를 이용해 웨이퍼의 앞면과 뒷면을 기계로 마모시켜 표면을 얇고 균일하게 만들고, 이를 씻어 열처리 시설로 보내는 것이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업무다.
공장에 입사한 후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웨이퍼를 랩핑 하는 작업을 담당했었다. 랩핑 작업을 하기 위해 캐리어라고 불리는 쟁반같이 넓고 평평한 받침대 위에 웨이퍼를 올린 후 장비에 투입한다. 장비 재료 투입구에는 비커로 연마제와 분산제, 물을 투입하게 된다. 기계가 돌아가고 랩핑이 끝나면 내가 나설 차례가 된다. 이동식 압착 기구로 웨이퍼를 빼낸다. 그리고 라텍스 장갑을 착용한 상태에서 흐르는 물에 웨이퍼를 세정한다. 세정한 웨이퍼를 카세트에 하나씩 넣은 후, 카세트에 있는 웨이퍼를 꺼내 평탄도를 측정하는 표본 검사를 진행하게 된다. 샘플링 검사 후에는 세정 조에 담긴 물에 초음파 디핑을 한 후 상자에 담아 열처리 실로 인계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아씨....이거 몸에 괜찮은 거야? 빨리 그만둬야지. 이러다 죽겠네.”
같은 조인 석현 씨는 오늘도 또 중얼거렸다. 우리 사이에서 건강염려증 대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석현 씨다. 석현 씨는 나와 같은 조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만을 토로한다. 석현 씨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유해화학물질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우리가 취급하는 기계에서 내뿜는 극저주파 자기장, 질산, 황산, 염산, 연마제 모두 화학 약품이고, 몸에 해로운 물질이기 때문이다. 방독마스크, 라텍스 장갑, 보호안경을 착용하지 않고 이렇게 일하게 되면 우리는 점점 화학물질들에 병들어 죽을 거라고 그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출근 때마다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일반 일회용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이 전부였다. 모두 일회용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만을 낀 채 화학 약품들을 서로 희석했고, 웨이퍼를 세정하고 운반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악…. 눈이... 눈이…. 미치겠네. 어떻게 일하라는 거야.
랩핑 작업에 필요한 약품들을 희석할 때면 동료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인산과 황산 등 약품을 희석해야 했는데 약품들이 서로 반응하여 뿜어내는 수증기로 인해 숨을 쉬기 어려워진다. 눈이 시려 눈을 제대로 뜨기는 불가능하다.
‘크린룸’이 공장 안에 있기는 했지만, 실제 사용되는지 알 수 없었고, 대부분 작업장에는 크린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해로운 가스들이 방출되고 있지만 특별한 국소 배기장치조차 없었다. 그저 벽에 부착된 팬이 기계와 화학 약품이 섞이면서 뿜어내는 물질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계음으로 가득한 공장 천장에는 먼지가 잔뜩 끼어 있는 파란색 플라스틱 팬만 고요하게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매년 재정을 이유로 환기 시스템 정비 약속을 무기한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작업자들은 사계절 내내 목감기나 기관지염을 호소했다.
주야간 근무가 우리를 더욱더 병들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2조 2교대 근무로 주 6일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였다. 주간 근무는 오전 8시부터 20시까지, 야간근무는 20시부터 다음날 8시까지 이어졌다. 1시간의 식사 시간과 10분씩 2회에 걸친 휴식 시간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쉬운 업무는 아니었다. 특히 20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하는 날에는 유난히 정신이 몽롱하고 신체 리듬이 모두 깨져 버린다. 입안에서 올라오는 쓴 내를 풍기며 그렇게 집으로 발길을 향한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목 안에서 올라오는 쓰디쓴 쓴 내는 매일 낯설게만 느껴졌다.
납품일이 가까워지면 초과 근무는 당연히 따라왔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몸을 쓰고 시간을 내어주며 벌어오는 돈으로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살아낼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이직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씩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 11년이 되던 해, 점점 몸에서 이상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흡연과 음주도 하지 않았고, 특별한 병력도 없었는 건강한 성인 남자였다. 마흔이 넘으면 성인 남성이 겪는다는 당뇨 질환, 지질혈증이 전부였다. 하지만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휴일에 집에서 쉬었지만, 피로감이 항상 몸 안에 엄습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혈기가 없이 창백했다. 어지럼증도 함께 동반되었다. 작은 기침과 발열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악!!!!!!!!!!!!!!!
반도체 세정 기계에 정강이를 부딪치던 날이었다.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둘째치고 정강이에 엄청난 멍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어지럼증으로 더 이상 작업장에서 기계작업조차 쉽지 않았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고, 만성 피로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증상이 계속되었다.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주야간 근무를 해야 하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수 없었다. 11년이라는 시간을 뒤로하고 반도체 공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완전히 그만둘 수 없었기에 주간에 앉아서 근무할 수 있는 택배 포장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도체 공장을 그만두고 몸에서는 계속해서 이상 증상이 찾아왔다. 반도체 공장을 그만두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만성 피로감과 핏기 없는 얼굴, 쉽게 멍이 들거나 코피와 출혈이 발생했고, 잦은 감기로 몸은 더욱 지쳐갔다.
아내 수정이의 권유로 받았던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혈액세포에 문제가 보이므로 심화 검진을 권유한다는 내용이 유난히 선명히 적혀 있었다. 내 나이 44살, 병원에서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진단받았다.
"환자분, 2015년도부터 받아오신 검진 결과도 함께 살펴봤는데요. 혈색소 수치가 계속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혈액검사 결과 골수형성이상증후군입니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란 쉽게 말하면 골수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골수에서는 혈액세포를 만들어 내는데 골수 이상으로 건강한 혈액세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보통 50세에서 90세 사이에 발병하는데 선생님은 아직 40대인데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혈액종양내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앓게 되면 빈혈이 발생하고, 혈소판이 감소하며 합병증 위험도 크다고 한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은 단일 질병이 아니며 스펙트럼 질환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나의 경우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렇게 2018년 병원에서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앞으로의 생계가 막막하기만 했다. 어린 딸과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 안에 있는 것들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앓았던 환자들의 후기가 남긴 카페에서 여러 글을 찾아 읽었다. 힘든 치료 과정이었지만 완치해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글들에 그나마 잃었던 희망이 생겼다. 힘들게 시작한 치료는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결국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년 후 마흔다섯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나는 8살 딸을 가진 엄마 김수정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11년 넘게 일했던 남편 민수 씨는 2018년도에 갑작스럽게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진단받았다. 그리고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우리를 떠나갔다.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으로 패혈증, 간접 사인으로 골수형성이상 증후군이 적혀 있었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진단받았을 때만 해도 절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치료하면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던 남편 민수 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는 남편의 죽음을, 아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먹고살 일들을 걱정해야 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린 남편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나다가도, 우리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 끝없는 무서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딸아이는 아빠의 죽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는 휴일이면 목마를 태우고 빙빙 돌며 웃던 아빠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서럽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깊은 슬픔과 허망함이 우리 가족을 덮쳤다. 그 어두운 터널 안에서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 내야 한다는 사실.
민수 씨의 장례를 치르고 한 달이 지났을 때, 2층에 사는 주인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불투명하고 끝나지 않을 슬픔 속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민수 씨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든 그런 날이었다.
"새댁, 어쩌다 그리 되었당까. 에구야. 사람 참 좋았는데…. 맞아. 새댁 있잖아. 근디 주리 아빠는 왜 아팠던 거여? 새댁이 병원 간병다닌다는 이야기 듣구 금방 나을지 알았지 그랴.... 혹시 요 앞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리 된거 아녀? 우리 아들이 그러던데 근로복지공단에 그…. 뭐라? 산재? 그거 신청하면 유족들한테 돈도 주고 그런다던 디…. 그거 한번 신청해 보라고 그러더라고. 새댁한테 한번 이야기 해보라고…."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민수 씨의 창백한 얼굴과 그가 매일 같이 출근했던 각진 컨테이너 박스로 채워진 반도체 공장이 겹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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