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알 수 없는 여행
"임신이라고? 와, 축하해요. 김 변호사. 다시 돌아올 거죠?"
박 부장님은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을 듣자 진심 어린 축하를 전했다. 축하 인사가 끝나고 그녀는 출산 후 복직할 수 있는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에는 새삼스러운 질문이었기에 그런 걸 물으시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육아휴직 끝나면 바로 복직할 거예요."
박 부장님은 출산 후 육아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그러니까 누가 도와줄 것인가에 관해 더 묻고 싶은 눈치였다.
"음. 근데 김 변호사. 친정이 서울이라고 했으니 여기와 상당히 머네요. 시댁은 좀 가깝나?"
"부장님, 시댁은 경남 쪽이라 여기서 2시간 정도예요."
"흐...음… 그래요. 출산휴가 시작 전까지 잘해봐요."
박 부장님은 말을 더 얹으려고 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사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박 부장님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타지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그것은 연고 없는 곳에서 일하며 가족들 도움 없이 아기를 키워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박 부장님 역시 연고 없는 타지에서 아이 둘을 키워 내고 있었다. 친정어머니가 7년째 육아를 전담해 주고 계셨다. 젊었던 친정어머니는 두 아이 육아를 전담하였고, 밤마다 아픈 곳이 늘어 가고 있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하신다고 하셨다. 육아란 누군가에게 외주를 주듯 쉽게 맡겨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육아 선배인 박 부장님은 긴 시간 동안 육아의 쓴맛과 단맛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육아의 ‘육’자도 몰랐던 나는 아이 출산 후, 육아휴직이 끝나면 멋지게 복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아이를 낳은 후, 복직하지 못하게 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조부모님이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지만, 베이비시터 이모님을 구하면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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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일이 다가왔고, 배가 불러왔다. 만삭 사진을 찍어준다는 곳에 남편과 방문했다.
촬영 전 메이크업을 받으며, 메이크업 원장님 수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포근한 얼굴에 인상이 좋아 보이는 수잔은 자신을 아이 둘 엄마라 소개했다. 그녀가 물었다.
"우리 산모님, 일하고 계시는구나. 출산하시고 복직하시는 거예요?"
수잔 원장님 이야기에 에이,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시는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복직이라는 대답을 들은 수잔 원장님이 내 눈썹에 세심한 붓질을 하며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요. 산모님. 그런데 그건 아이를 낳아 봐야 알게 될 거예요.”
수잔 원장님께 회사 복직은 아이를 낳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은 후, 복직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인생 지도에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이었다.
“수잔 선생님, 아이는 아이 인생이 있고, 저는 제 인생이 있잖아요. 저는 주체적으로 제 인생을 살아갈 거예요.”
수잔 원장님은 자신감에 넘치는 대답을 듣더니, 귀엽다는 웃으며 한마디 뱉었다.
"산모님, 정말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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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2023년 4월 건강하게 세상에 나왔고, 쑥쑥 자라 주었다. 이름은 도도. 아이가 배 안에서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우리가 처음 눈을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아기들은 어떻게 본능적으로 엄마를 알아보는 것일까. 도도 역시 안아주면 울다가도 방긋 웃었고, 엄마를 참 좋아해 주었다. 옆에 있으면 어떻게 알고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우리를 찾아온 아이였구나.’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이렇게 작을 수 있다니.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아 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세상에 태어난 작은 도도에게서는 예쁜 구름 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도도는 쑥쑥 자라났고, 16개월에 접어들었다. 아이가 자란 달만큼 회사로 복직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도가 새근새근 자고 있던 어느 날 밤, 남편이 말을 건넸다.
"여보, 이제 복직이라 베이비 시터를 구해야겠어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많이 자랐지만 내 눈에 도도는 너무도 작았다. 말 그대로 아기였다. 이렇게 작은 아기를 두고 직장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도도를 만난 후, 변호사 커리어를 쌓으며 탄탄대로를 달려가겠다고 수잔 원장님께 말했던 나인데. 그때의 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럼에도 눈을 꼭 감고 복직을 할 것인지,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돌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정답은 없었다. 그렇기에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우왕좌왕하며 고민만 깊어졌다. 어떤 이는 출산휴가가 끝나자마자 바로 아기를 맡기고 복직해서 아이도 잘 컸고 커리어도 잡았으니 오히려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조언했다. 또 전문가들은 만 3세 이전까지는 엄마 품에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쏟아 놓으며 초보 엄마인 나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육아와 커리어를 모두 잡았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생애 초기 엄마가 최고라는 전문가 이야기도 모두 정답 같았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나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기억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인도에서의 시간이었다.
철없던 24살. 친한 선배 언니와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인도로. 인도에서의 한 달. 완전히 다른 세상에 툭 떨어져 배고팠고, 지저분했고, 좌충우돌했던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다.
인도라는 곳이 척박한 땅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어느 때보다 근심없이 많이 웃었다. 행복했고 자유로웠다. 인도라는 날것의 환경과 인도인들이 가진 ‘노 프러블럼 정신’은 네 마음이 이야기하는 대로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하며 어지럽기만 했던 20대의 나를 다독였었다.
인도 캘커타 마더 하우스 호스피스에서 만났던 생의 끝에 있는 사람들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가 진정 원하는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고. 인도 여행을 마치며 나는 20대의 나에게 다짐했었다. 내 마음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이다.
육아와 커리어 사이를 방황하고 있던 내게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은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주어진 생애 안에서 가능하면 마음이 즐거울 수 있는 일,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여러 가지 수 안에서 나는 결국 머릿속에 또렷하게 계획해 놓은 여정이 아닌 마음이 원하는 길을 가보기로 했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방향을 알 수 없는 길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하는 조금은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메인화면: pinte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