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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Jan 21. 2024

라면을 끓이며

추운 겨울날이었다.  인생 32개월 차 도도와 집 앞 산책을 나갔다. 바람길로 들어서자 갑자기 서해 바다 쪽에서 우리를 날려 버릴 듯 매서우며 얼음장 같은 바람이 휘이이잉 소리를 내며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엄마! 날아갈 것 같아요."


거칠게 내리치는 바람에 눈을 꼭 감은 도도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겨울 바다 바람에 나 역시 말문이 막혔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도서관 건물이 눈에 띄었다.


"도도야, 저기로!"


도도가 세찬 바람에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확인도 못한 채 도도 손을 꼭 붙잡고 작은 도서관 건물로 들어다. 차가운 바깥세상과는 달리 작은 도서관 안은 평온하고 따스한 공기로 가득했다. 작은 도서관 안에는 사서 선생님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두 분 다 집중하며 노트에 성경을 필사하고 계셨다. 그러다 앞으로 성경필사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에 관한 긴밀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서 선생님께 인사 후 도도와 평화롭게 도서관을 거닐며 책구경하기 시작했다.


작은 도서관은 약 15평 정도 크기라 도서관 구경은 금방 끝났다. 그때 여러 책 중 눈에 띈 책 한 권이 있었다. 그 책 제목은 김훈 작가님의 "라면을 끓이며". 살을 에는듯한 바람 속을 헤매서였는지 바람 속으로 날아갈 것 같다는 다급한 도도의 외침 때문이었는지 "라면을 끓이며"라는 제목이 에 쏙 들어왔다. 라면을 끓이며라는 제목만 보고 있어도 배 안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김훈 작가님은 책 속에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라면 조리법을 상세히 써 놓으셨다.  비법은 아래와 같다.

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스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유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붇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중략)

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키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고 화산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또 삽시간에 익는다. 익으면서 망가지지 않는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중략)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 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중략)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 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중략)

그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은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끊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중략)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과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김훈 산문, 라면의 끓이며, 문학동네 p29-30 중에서>


강추위에서 만난 작은 도서관에서 도도와 나는, 아니 나는 김훈 작가님의 "라면을 끓이며"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밀 서적이라도 되듯 책을 품에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책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책에 쓰인 대로 한번 여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었다. 마음속에서는 저녁 메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보, 오늘 김훈 작가님이 쓰신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에 라면을 끓이는 비법이 나왔더라고요.  똑같이 한번 여 먹어 보려 한답니다. "

"오! 좋아요."


그날 저녁 메인 메뉴였던 김밥과 김훈 작가님표 라면을 끓여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김훈 작가님이 활자로 펼쳐 놓은 라면 비법을 현실에서 구현해 보기로 한 것이다.


다만 집에 야외용 휘발유 버너가 없는 관계로 가스레인지 불을 최대로 세게 하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도 면발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평소보다 많은 700ml를 부었다. 냄비 안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면을 넣고 수프는 3분의 2만 넣었다. 색깔을 보니 연한 주황색이라 너무 싱거울까 싶었지만 김훈 작가님이 쓰신 대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했다. 라면을 2분쯤 보글보글 끓이다 썰어 놓은 대파 하얀색 부분을 넣었다. 그리고 뚜껑을 덮은 후 1분 30초였다. 불을 끄고 던 모습이 사라지고 풀어놓았던 계란을 샤샤샥 부은 후 다시 뚜껑을 닫았다. 라면은 집에 안성탕면뿐이라 안성탕면으로 였다.


드디어 시식의 시간이 돌아왔다. 남편과 나는 다소 긴장된 그리고 엄숙한 모습으로 라면이 불을까 싶어 급 라면이 담긴 냄비를 식탁에 놓고 둘러앉았다. 삼엄한 그 순간 우리보다 먼저 저녁을 먹은 도도가 같이 놀아 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지금 밥을 먹고 있는 중이라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급히 말했다. 그리고 책 속에 들어 있던 라면 시식을 시작했다.


"후르르르르 쩝쩝"

"후르르르르 쩝쩝"


거실에 라면 먹는 소리만 울리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먹다가 남편이 말 한마디를 띄웠다.

 

"음, 건강한 맛이 나네요."


정말 그랬다. 스프를 3분의 2만 넣었더니 짭짤 맛이 누그러지고 청량한 파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건강한 라면이 되어 있었다. 옆에서 놀던 도도 엄마와 아빠가 뭘 저렇게 맛있게 먹는가 궁금했던지 아빠 옆으로 쪼르르 와서 앉는다.


"나도 좀 주세요."


갑자기 라면을 달라는 도도의 말에 라면인데 줘도 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도도에게 면발을 주며 많이 먹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면을 먹더니 도도 눈이 동그래지며 반짝였다. 인생 첫 라면을 먹은 도도의 소감은 어땠을까. 도도는 라면이 맛있었는지 몇 번을 더 먹은 후 자리를 떠났다.


사실 "라면을 끓이며"에 쓰인 김훈 작가님의 라면 비법을 현실에서 백 프로 구현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 40프로 정도 구현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훈 작가님 레시피 라면을 현실에서 만난 느낌은 이러했다. 건강한 맛이 나는 라면이다. 대파 향이 은은하게 나는 라면이다. 보드라운 계란이 쫄깃한 면발을 예쁘게 덮고 있어 32개월 아이에게도 조금 맛 보일 수 있다. 아이가 맛있어한다.  


책에 나와 있는 비법을 이렇게 저렇게 현실로 재현해 보아도 "라면을 끓이며"에 쓰인 활자로 된 그 라면이, 상상 속의 라면이 가장 맛있는 라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는 김훈 작가님의 말처럼 라면의 길은 끝이 없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토요일 밤 라면을 끓이며.


*메인 이미지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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