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서울 일정이 있어 오전 6시 30분 출발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기차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를 탔다. 깜깜한 새벽에 택시가 있을까 싶었지만 카카오 택시를 호출하니 근처에 기사님이 계시다는 알림이 금방 도착했다. 집에서 오전 5시 30분에택시를 타고 30분 만에 역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님이 총알처럼 달려주신 덕분에 생각보다 기차역에 빨리 도착한 것이다. 기사님이 차 없는 새벽 도로를시속 120km로 달리는 바람에 마음이 괜히 조마조마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기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약 30분 여유 시간이 생겼다.
사실 택시 안에서 따뜻한 밀크티와 샌드위치가 생각났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에 도착하니 내 생각과 달랐다. 역 안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당연히 카페도 열려 있었고, 나와 같이 허한 속을 따뜻하게 채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역 끝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가 택시 안에서 생각한 따뜻한 밀크티와 대만식 샌드위치라는 이름을 가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달콤하면서 따뜻한 밀크티 온기에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그렇게 따스함이 마주하던 순간 떠오른 기차역에 대한 웃어야 맞는지 모를 기억이 둥실 떠올랐다. 이 기억은 내가 가진 허당미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수도 있겠고, 좀 황당한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변호사님, 내일 서울에서 재판이 있네요."
"네, 맞아요. 다음 주 4일 11시에 서울 중앙지법 재판이에요."
"어떻게 가실 거예요. 저는 대전에서 오전 9시 345호 기차 타고 갈 건데요. 같이 가시지요."
대전 쪽에서 일하고 있던 때였다. 다음 날 서울에 재판이 있었고, 당연히 기차를 이용해 서울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같은 팀이었던 변호사님도 같이 가시게 되었고, 길이 같으니 같은 기차를 타고 가자고 제안하셨다.
가뿐한 마음으로 SRT예매 앱으로 들어갔다. 당시 세종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송에서 출발해 수서역으로 가서 법원으로 가면 되는 여정이었다. 그렇게 8월 4일 오송 출발 수서도착 8시 45분 345호 열차를 클릭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SRT 오전 8시 45분 기차가 예매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나의 친구 포동이라고 부르는 자동차를운전해 오송 주차장으로 향했다. 당시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운전이었기에 다소 긴장한 마음으로 천천히 운전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기 전, 자동차를 오송역 주차장에 주차해야 했는데 일찍 출발한 덕분에 여유 시간이 많았다. 주차를 마쳐도 시간이 넉넉할 것 같았다.
' 아, 역시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지. '
여유가 넘치는 뿌듯함을 느끼며 오송역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나와 같이 아침에 열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오송역 주차장에는 이미 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어디엔가 자리가 있을 것이라 괜찮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주차장을 몇 바퀴 돌았다. 간혹 빈자리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초보인 나와 포동이로서는 주차가 불가한 자리였다. 이미 시계는 8시 35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지.... 스스로에 대한 위로는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의리도 없이 평소 아끼는 내 친구 포동이를 아무 데나 버리고 기차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검은색 세단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마음속으로 얏호 환호성을 지르며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검은색 세단이 빠져나간 자리에 뒤뚱뒤뚱 주차를 마쳤다. 포동이 모양새가 조금 삐뚜름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정도는 아닌지라 차를 세우고 전속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높은 구두가 후회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
"헉, 헉, 헉"
스스로 내가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고 생각하면서 뛰고 또 뛰었다. 오송역은 에스컬레이터를 두 개 거치고 마지막 에스컬레이터를 한개 거쳐야 승강장에 도착할 수 있다. 단단한 강철 에스컬레이터에 뾰족한 구두 굽이 세차게 부딪히며 딱딱 딱딱하는 빠른 리듬의 굉음이 오송역 안에 울려 퍼졌다. 다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바닷길이 갈라지듯 길을 샤샤삭 피해 주었다. 열차 시간에 늦었나 보네, 어쩌냐 하는 안타까운 눈빛까지 더해서 말이다. 길을 비켜주어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숨이 차서 말이 안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끝까지 뛰어야 했다. 숨이 턱을 넘어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계단을 올라 올라 드디어 기차가 출발하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이얏호! 마침 기차와 내가 동시에 도착했다.
"살았다."
나는 기차 번호를 확인할 새 없이 기차가 떠나갈까 싶어 급히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행, 서울행 오전 8시 42분 열차가 출발합니다."
기차에서는 이제 출발하겠노라는 방송을 알리며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도착해 기차에 올라타느라 예매한 좌석이 위치한 10호차가 아닌, 2칸 떨어진8호차에 올라타 있었다. 나는 8호차에서 10호차로 천천히 이동했다. 기차 안에는 아침임에도 사람이 꽤나 많았다.
'내 자리는 어디 있나? 난 10호차 5D좌석이구나. '
그렇게 10호차로 들어서 자리를 확인한 순간 5D 좌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거였다. 내 자리인데 저분이 왜 앉아 있을까, 잘못 앉아 있으신가 보다 싶어서 말을 걸려는 순간 카톡이 도착했다.
"김변호사님, 기차 안 타셨어요? 왜 안 계시나요?"
"네? 저 지금 기차 타고 가고 있는데요. 지금 10호차 안이예요."
"그래요? 안 보이는데요. 어디 계시는 거예요?"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분명 서울로 가는 기차라고 했고, 오전 8시 45분 기차에 탔는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렇다. 상황은 이러했다. 나는 수서역으로 가는 SRT 열차가 아닌 서울역으로 가는 KTX 열차에 탄 것이다. 내가 올라탄 기차는 8시 45분 열차였는데, 급히 승강장으로 뛰어온 나는 8시 43분에 도착한 열차가 내가 예매했던 8시 45분 열차인 것으로 착각하고 잘못 탄 것이었다.
이런 허당스러운 행동에 변명을 더해보자면 기차를 많이 안 타봤기 때문이었고, 무지한 탓에 KTX와 SRT 열차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구차한 변명으로 이해 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랬다.
그래도 긍정적이었던 나는 그래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타고 있던 열차가 수서를역을 가든 서울역을 가든 어쨌든 서울에 간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탔으면 어쩔뻔 했을까. 그래도 이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재판을 가면 되는 것이니 걱정할 것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순간 표도 없는 기차에 타고 있으니 무임승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승무원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중 검표를 하며 지나가던 승무원님이 보였다.
"저... SRT열차를 예매했는데 KTX열차를 탔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손님. 잘못 타셨네요. 제가 예매하신 표 취소하고 지금 타고 있는 열차로 다시 예매해 드리겠습니다. 목적지 도착하시고 편히 내리시면 됩니다."
"이야. 해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사같이 친절하신 승무원님의 도움으로 마지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예정되었던 재판에도 잘 참석했다. 기차에서 같이 만나기로 했던 변호사님은 나중에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같이 가기 싫어서 일부러 다른 기차에 탄 것이 아니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 이후 기차를 탈 때면 SRT와 KTX 열차를 확인하면서 타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SRT는 자주색 무늬가 있고, KTX는 파란색 무늬가 있는 기차로 모양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늘은 해뜨기 전 새벽에 기차역 카페에 앉아 밀크티와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먹으며 앉아있다. 집에서는 남편과 도도는 쿨쿨 자고 있을 것이다. 사람 구경도 하며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다 열차에 대한 기억을 건져낸다. 내 앞에는 따뜻한 음료를 홀짝이며 서울에 가서 뭘 하며 놀까 설렘에 계획을 세우는 여학생들이 앉아 있다. 친구들과 서울로 놀러 가는 듯한데, 한 여학생이 집을 나서는데 엄마가 서울에 누구랑 가느냐고 꼬치꼬치 캐묻어서 난감했다고 이야기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 모습에 괜히 나도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렇게 기차역에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설렘이 가득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온기가 기차역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예매한 열차 탑승 안내가 들려온다. 카페에서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승강장에 올라간다. 예매한 KTX 서울역 행 열차에 다소곳이 올라타 앉아 창밖을 지긋이 바라본다. 참. 좋다는 생각과 함께 기차가 출발한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고 뒤로 가는 기차를 보며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