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달이는 어머님 약재밥상

어머님을 일으키는 보약 지팡이 <보양환오탕(補陽還五湯)>

by 리아

어머님을 일으키는 보약 지팡이 <보양환오탕(補陽還五湯)>

“나 지금 충주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머님의 목소리. SUV 차량을 몰고 문경에서 동탄으로 올라오고 계신 중에 충주휴게소에 들러 전화를 하신 것이다. 어머님의 당일 통보 방문이 당황스러운 신혼 초였다.


어머님은 암 환자셨다. 상견례 때 이미 수술을 앞두고 계셨다. 어머님의 암 진단에 아버님과 남편은 마음 아파했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어머님은 우리 결혼을 앞두고 아버님과 리마인드 웨딩을 하셨다. 그렇게 결혼을 올리기 전부터 어머님은 환자셨다. 그런데 매우 에너제틱한 환자셨다.


어머님의 에너지 레벨은 보통이 아니었다. 운전도 수준급이었고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활동량이 어마어마했다. 일단 다니시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서울로 가실 때도 캐리어를 싸는 모양새는 여행 가는 사람처럼 노련하셨다.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가 어머님께 암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암 환자에게 시간은 약이 아닌 독이었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당신 스스로 운전을 할 수 없는 때가 왔다. 충주휴게소에 전화를 하시곤 했던 어머님은 그즈음에는 수원 시외버스정류장을 앞두고 전화를 하셨다.


그런데 버스를 타시는 것마저 힘들게 되었다. 거동이 더욱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신혼 초 당황함과 스트레스를 함께 주었던 어머님의 “나 지금 충주다.”는 벌써 왕년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SUV 차량을 더 이상 운전할 수 없게 되었어도 한동안 어머님은 차량을 처분하지 못하셨고 와중에 운전면허증 갱신까지 하셨다. 그러니 핸들을 잡았던 손에 지팡이를 쥐어 드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팡이라도 짚고 다니시던 때는 그나마 자유로우실 때였다. 이제는 두 팔이 다리가 되어 기다시피 움직여 힘겹게 이동하신다. 집 안에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 삶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게 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이 갑갑하실 거 같다.


어머님의 거동이 불편하게 된 까닭은 단순히 근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원발암이었던 대장암이 폐에 이어 뇌로 전이가 되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7년 전 15회의 뇌 방사선 치료를 받으신 바 있다. 당시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에 대해 알고는 있었고 고민을 꽤 많이 했었다. 생명과 삶의 질 사이의 선택에서 어머님은 생명을 선택하셨다.


딸 아이의 앞머리는 어머님 담당이었다. 머리숱이 풍성했던 어머님은 뇌수술로 인해 머리를 모두 미셔야 했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는 어머님이 손녀의 자라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계시다

뇌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은 처음에는 서서히 나타나는 것 같더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가속도가 붙었다. 최근에는 급격하게 진행이 되어 초기 치매와 거동불능을 보이고 계시다. 워낙 두뇌가 뛰어나신 분이라 방사선 치료 직후에도 “어머님, 뇌에 방사선 치료를 받으셔도 저보다 머리가 더 좋으신 거 같아요.”며 추켜 세워드리곤 했는데 지금은 방금 전에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신다. 질환에 노환이 더해져 세월 앞에 장사 없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효자 남편을 둔 아내는 괴롭다던가. 우리 부부 역시 아프신 어머님을 두고 갈등이 쌓여갔다. 거동이 자유로울 땐 자유로운 대로 불편하실 땐 불편한 대로 며느리인 나는 늘 불편하고 힘들었다. 나름의 도리는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된 밥상 한번 차려 드린 적 없다. 이제는 매달 두어 차례 어머님 한약을 직접 달이고 있다. 며느리의 약재밥상인 셈이다.


남편은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의 처방을 여러 날 고민했다. 어머님 처방은 단순히 기력을 보하는 어르신 보약

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뇌신경의 문제로 인해 내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고민 끝에 나온 처방은 ‘보양환오탕(補陽歡五湯)’이었다. 보양환오탕은 중풍으로 반신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거나 눈과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구안와사처럼 뇌기능의 이상으로 인한 증상에 쓰는 처방이라고 한다.


한데, <보양환오탕> 처방전에 ‘지룡(地龍)’이라는 약재가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간 남편의 처방에서 거의 보지 못한 약재였다. 녹용도 아니고 지룡은 뭐지? 윽! 알고 보니 지렁이였다. 지렁이의 구멍을 찾아 파고 들어가는 성질은, 맺혀 있는 어혈을 풀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렁이는 전갈이나 지네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중풍, 반신불수, 구안와사 등과 같은 증상에 쓰여 왔단다. 어릴 적 시골 시장에 가면 말린 전갈과 지네가 있는 것을 얼굴 찌푸리며 본 기억이 난다. 당시엔 혐오약재라 생각했는데 실제 지룡의 ‘룸보르키나제’는 혈전용해효소로도 좋아 제품화되어 있다.


보양환오탕을 드시고 어머님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리신다. 물론 전과 같은 회복은 기대할 수 없지만 더 나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시간이 독'인 어르신들께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 치료이기도 하다. 남편이 처방한 보양환오탕은 어머님이 의지하는 '보약 지팡이'가 된 셈이다. 40여 년 전, 어머님은 호흡곤란으로 힘들어하는 아들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약을 달여 먹이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 어머님께 한약을 먹이는 남편의 모습에서, 아들을 품에 안고 한약을 먹이는 젊은 시절의 어머님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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