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0.1%의 삶
<내 법대로 산다 - 봄 편> - 본문
때는 대학교 졸업학년 무렵이다.
김마이너는 모 명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시험기간도 아닌데 두꺼운 심리학 원서에 파묻혀 며칠 밤을 지새곤 할만큼 그저 전공을 사랑했던 순수한 심리학도였다.
그러니 꿈은 당연히 계속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일 수밖에.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장래 진로에 대해 얘기를 할 때 누구는 '사법고시'를 준비한다, 누구는 '행정고시'를 준비한다, 누구는 '사업'을 한다, 누구는 '대기업 취업' 을 준비한다 등등의 얘기들이 나왔지만 나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처럼 들렸다. 속으로 고매한 학과 같이 '나는 너희들과 달리 순수한 학문의 길을 갈거야' 하는 마음이었다. 그때까지 김마이너는 현실적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교 졸업학년이 되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 했다. 좋아하는 학문을 계속 하자니 대학원에 가고 유학도 가야하는데 긴 유학생활을 버틸 만큼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실은 유학비용보다는 그 시간을 견딜만한 배짱이 없었으며, 내 청춘을 학문에 헌납할 만큼 내가 학문을 좋아하는가 라고 자신에게 되물었을 때 확신에 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하지' 란 현실적인 생각에 골똘히 잠긴 결과, 명문대 출신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반 회사에는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고 어떤 전문분야를 가지고 싶었다. 아니 전문분야보다는 실은 혹독한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 줄 자격증이란 방어막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난한 학문의 길도 아닌, 일반 취직도 아닌 그 어느 중간에서 '법조인이 되면 자기 전문분야를 가지면서 적당히 사회적 영달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적당한 생각이 났고, 이러한 두뇌 속 대타협의 결과로 나는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별다른 고민 내지 성찰 없이 로스쿨에 진학했고 그렇게 내 진로는 한 순간에 결정돼 버렸다. 짧은 준비기간에 원하는 로스쿨에 덜컥 입학해서 기쁜 것도 사나흘. 로스쿨에 입학하자마자 방황이 시작됐다.
해 오던 학문과는 전혀 다른 법 공부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주위에서 다 열심히 뛰고 있었기에 잠시 서있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학기부터 시작되는 학내 치열한 학점 경쟁은 그런 고민의 시간조차 사치로 만들었다.
그렇게 달려가다 한 학기 만에 몸과 마음이 고장나 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공부를 했으니 학점도 역시 하위권이었다. 해맑음을 자랑하며 밝게 살아왔던 나인데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나타났다. 원하는 로스쿨에 입학해서 열심히만 하면 미래가 보장되는 진로에 들어선 지금 누구보다 행복해 할 이 시점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생 최대의 방황을 맞이한 것이다. 결국 나는 로스쿨 한 학기만에 휴학을 결정했다.
휴학을 하고 기숙사에서 용달차에 짐을 씯고 부모님과 함께 본가로 돌아가던 날이 기억이 난다. 얼마나 후련하고 상쾌했던지. 부모님께 실망감을 안겨드려 죄송한 마음이 내심 있었지만 죄스럽게도 날씨마저 너무 화창했다. 집에 내려와 며칠 쉬다 보니 몸과 마음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좀 쉬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다른 것은 모르겠고 확실하게 드는 생각이 있다면 그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정형편이 그렇게 안 좋은 편도 아니지만 막 좋은 편도 아니어서 나는 항상 돈 걱정에 시달리며 살았다. 로스쿨은 당연히 3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나란 인간은 말하자면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를 사먹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오늘의 할인 상품이나 1+1 상품으로 손이 가고 '나는 리얼해'라고 외치는 생과일주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인간이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번 생은 리얼해질 수 없는 것인가.
그러던 와중에 당시 듣던 머니스웩 힙합음악은 이런 나의 돈에 대한 열망에 기름을 부었다. 그 노래들은 대략 이런식이었다.
New Mercedes flow
4백만원짜리 지방시 자켓을 입고
광명시를 벗어나지. 내겐 매일이
돈 버는 날이지. 넌 못 믿어도 ladies know
Illionaire's in the building, and now I'm back up on my shit
내 다음 앨범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정규 앨범은 미뤘고 이걸 줄게 대신
사실 이건 좀 쩔어 믹스테입이라기엔
난 바닥에서 왔고 돌아가지 않아
이제 나는 부자고 가난하지 않아
그런 식의 가사를 내게 바라지 않길 바래
여전히 난 오로지 내 삶을 랩하는 artist
먼 길을 왔지, G-Shock to Rolex
가속 페달을 밟을 뿐 never goin back
난 아름다운 여자들과 마셔 모엣
She's so wet, so we do it till the morning
- 더콰이엇의 <AMBITIQN>이란 곡 중에서 -
그런 노래들을 들으면서 난 자신의 능력으로 자수성가하여 화려한 삶을 사는 랩퍼들을 동경했다. 비록 지금은 편의점에서 음료 하나도 내맘대로 못사는 '리얼'하지 못한 처지이지만, 언젠가 내 능력을 키워 돈을 많이 벌어서 한번 걱정 없이 돈을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법조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은 머니머니 해도 바로 '대형로펌'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대형로펌 변호사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 화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나온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나중에 꼭 대형로펌에 들어가야지' 라고 절치부심하며 이를 갈았다.
대형로펌은 보통 로스쿨 재학 중에 인턴을 실시하여 미리 채용을 하는데 이를 컨펌이라고 한다. 지금도 같은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로스쿨 1학년 겨울방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조기에 컨펌이 이루어졌다. 대형로펌 컨펌을 받기 위해서는 로스쿨 학내 성적, 인턴시 실시되는 자체 과제, 직장 경력, 외국어 능력, 특기 등 각종 스펙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내가 대형로펌에 취직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김마이너의 1학년 1학기 성적은 하위 25% 정도였고 이를 만회할 만한 직장경력도 외국어 능력도 별달리 내세울 수 있는 재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도 주위에 외고, 과학고 등 특목고 출신의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하느라 힘들었지만 결국 잘 해내왔던 것처럼(김마이너는 교정에서 도마뱀이 발견되곤 하던 일반고 출신), 이번에도 그냥 잘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로스쿨에 복학한 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공부했던 것 빼곤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무튼 정말 열심히 했다.
그 결과 복학학기 학점이 전학기 대비 1점 가량(4.3 만점) 상위 10%로 기적적으로 상승했다. 그 성적표를 가지고 로스쿨 2학년 여름방학에 모 대형로펌 인턴에 지원했는데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인턴에 나가서 그러한 상승곡선을 피력하고 열심히 자체 과제를 치르고 두 번의 장시간 면접을 거친 끝에 결국 가까스로 대형로펌 컨펌에 성공하게 되었다. 주위에 나보다 성적도 좋고 몇개국어를 하고 말도 잘하고 사회성도 좋은 대단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뽑히다니, 그것도 복학 후 나간 첫 인턴에서.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 후 나는 대형로펌 뽕에 단단히 취하게 되었다.
내가 바로 대형로펌 변호사다!
초봉 1억의 고액연봉
매해 배출되는 변호사 1,500명 중에서 100명도 채 되지 않는
나이도 이제 갓 서른
내 앞에는 성공의 길만 남았구나
그야말로 상위 0.1%의 삶이다!
대략 이런 (지금봐도 재수 없는) 자뻑에 빠진 김마이너는 남은 로스쿨 기간과 변호사시험을 무사히 마친 후 드디어 로펌에 입사하였다. 그렇게 김마이너의 로펌생활은 호기롭게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내 생각보다 더 고급졌다(예고).
* 커버이미지 : 장 줄리앙의 일러스트
https://wewastetime.com/2015/04/22/wythe-hotel-jean-jull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