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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이너 Apr 13. 2020

빌딩숲 강남을 벗어나 옛동네 서촌으로 가다

풍류를 즐기기에 여기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내 법대로 산다 - 봄 편> - 본문






나는야 강남 차도남


회사에서의 마지막 금요일, 방을 돌며 인사를 드리고 환송회를 마친 후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재판이나 출장 등으로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한 회사 동료들의 전화까지 받고 나서 침대에 잠깐 누워있으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제 진짜 회사와는 '빠이빠이' 구나. 그러나 그대로 누워 쉴 수 없었다. 바로 다음날 토요일에 이사를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던 3년 동안 빌딩숲 강남에서 살았다. 정확히는 회사와 5분 거리인 삼성역 부근의 오피스텔. 처음에는 "여기 사람 사는 동네 같진 않은데" 하며 삭막한 도심의 분위기에 겁먹었지만 이내 점차 적응되어 갔다(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있었기에 아무렴 좋았다).  


그 곳의 모든 것이 기억난다. 사람 구경하기 좋아 매일 같이 가던 코엑스, 물건 살 일은 없지만 가끔 밥먹으러 들르던 현대백화점, 세계맥주 축제 등 여러 재밌는 축제가 열리던 코엑스 옆 광장(회사 동료들과 점심에 맥주축제에 가서 맥주를 마셨던 추억도 아련하다. 친구들 잘 지내고 있니?), 산책을 좋아해서 매일 같이 산책을 하던 코엑스 둘레길(코엑스를 한바뀌 쭉 도는 길, 하도 동료들한테 산책을 가자고 졸라서 강아지 같다고 놀림받기도), 주말에 피크닉 삼아 들르던 봉은사... 말하자면 끝이 없다. 


특히 새벽까지 야근하고 나와 코엑스 옆 광장쪽을 산책하다 보면 고층건물 사무실 곳곳에 아직까지 불이 켜져있는 모습, 길가 대형광고판의 형형색색 광고들을 보면서 가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 새벽에 나만 남겨진 것이 아니구나. 그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새벽까지 야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나를 외롭지 않게 어루만져 주었다. 또 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멋진 차도남이라는 자뻑에 취하기도 했다(웃음). 


새벽까지 항상 빛나던 삼성역 빌딩숲


그런 모든 것들이 그리울 테지만, 이제 퇴사를 한 마당에 거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남 한복판 오피스텔의 월세와 관리비 등을 다 포함하면 100만원이 넘었다. 백수가 되었으니 그 금액을 감당하긴 어렵고. 빌딩숲이 이제 지겹기도 했다. 마조히스트적인 차도남 생활은 청산하고 싶었다. 맹모삼천지교의 가르침과 같이 새로운 삶을 살려면 우선 동네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퇴사 후 어떤 동네에서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거주지에 있어 나에게는 아래 두가지 요건이 중요했다.   


먼저 그동안 살았던 빌딩숲 도심과는 달리, '고즈넉하고 사람 사는 냄새 나는 동네'일 것 : 차도남은 해봤으니 따시남을 해보고 싶었다. 


두번째 요건은 특이하게 '동네에서 산(특히 바위산)이 가깝게 보일 것' : 나는 많은 곳을 여행 다녔지만 라오스의 방비엥, 베트남의 사파, 페루의 쿠스코, 중국의 윈난 등 고산지대에만 가면 이상하게 엄마 품에 안긴 아기마냥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았다. 그래서 그 곳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일 산을 보며 살고 싶었다.


그 외 교통여건이 좋은지, 역세권인지 여부 등은 나에게 고려요소가 아니었다. 




서촌, 너로 정했다!


처음부터 서촌으로 정했던 건 아니었고... 인터넷에서 부암동이 핫하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갔는데 부암동의 작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에 둘러싸여 있어 어디에서나 산이 보였다. 부암동은 동네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암동쪽으로 자취방을 알아봐서 계약 직전까지 갔었다. 그 집에는 융자금이 몇천만원 있었는데 사실 땅값에 비해 그다지 문제되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한다고 며칠을 끌면서 임차보증금 권리 분석을 하다가 결국 집주인이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해버렸다(이 죽일 놈의 직업병...). 강남 집을 빼야 되기 불과 몇주전이었다. 절망적이었다. 노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디라도 빨리 살 집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그날 바로 까다롭게 따질 여유 없이 부암동에서 조금 내려온 서촌에 있는 원룸으로 즉흥적으로 계약을 했다. 그렇게 우연히 나는 서촌에서 살게 되었다. 


서촌이란 동네는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서촌은 부암동보다는 복작하고 깔끔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사람 나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만약 부암동에 살았다면 조금 심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또한 부암동과 마찬가지로 서촌에서도 (북한산은 조금 멀지만) 인왕산과 북악산이 어디서나 보였다. 특히 인왕산은 집에서 정말 가깝다.  


서촌에는 상반되어 보이는 특성들이 섞여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오래된 한옥들도 많지만 그 사이사이 현대식 건물들도 보인다. 통인시장, 동네마트, 과일가게, 미용실 등을 보면 오래된 옛동네 같은 느낌이 들지만 또 카페, 공방, 독립서점, 꽃집, 갤러리 등을 보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데이트 코스 관광지 느낌이 난다. 그런 상반된 면들이 오묘하게 조화스럽다. 그야말로 '서촌스럽다'고 할 수 있다. 서촌은 청와대 근처라 개발이 제한된 구역이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런 특이한 느낌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서촌의 거리를 걷노라면 지루할 틈이 없다. 길 자체의 분위기만으로도 매력있고 좁은 길로 가다가 막다른 길에 부딪히는 것도 재미도 있다(여기로 가도 길이 연결되어 있을까? 하는 모종의 스릴감). 길가에는 들어가보고 싶은 공간들이 넘쳐난다. 무료로 열려있는 갤러리들, 특색 있는 독립서점들, 이쁜 카페와 식당들, 발길을 잡아끄는 잡화점들,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예전에 마카오로 여행갔을 때 마카오에 대해 '지도를 보지 않고 정처없이 그냥 헤매도 좋은 도시'라는 소개글을 접한 적이 있는데 서촌에도 딱 맞는 말이다. 


집앞 바로 조그만 카페에서의 여유


며칠 전에도 도서관을 가는 길에 우연히 어떤 갤러리를 발견하고는 그에 이끌려 한참 동안 작품들을 감상했다. 이런 우연적인 발걸음에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인이자 이제는 사진작가 박노해님의 사진전.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라는 제목이 내 삶의 방향과도 비슷하다.


서촌에 처음 와본 사람들은 서울에 이런 동네도 있냐고들 한다. 청와대와 밀접해 개발 제한이 있는 덕분에 한옥과 골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경복궁과 어울려 도시 같지 않은 예스러운 동네 모습을 보고 방문객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뿐만 아니라 건축물 고도제한이 있어서 인왕산과 북악산의 능선이 고스란히 보이고, 서울 시내에서 하늘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네다. 깊이 있는 음식은 천천히 먹을수록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서촌에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 외에도 가슴 깊이 느낄 거리가 있는 곳이다. 나는 30년 동안 살아온 서촌 토박이로서 서촌을 찾는 방문객들이 그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경복궁과 청와대만 보고, 인터넷에 알려진 유명 맛집만 왔다가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웠다.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서촌의 매력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서촌은 힐링 플레이스healing place다. 서촌에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견디고 버티며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 동안 잊고 지낸, 이제는 다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추억과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난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 받는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조만간 봄이 올 것 같다. 골목을 걷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 서촌 전문가 설재우님의 책 <서촌방향> 중에서 -


동네가 지루해지면 서촌을 조금 벗어나서 걸으면 된다.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코로나로 인해 내부는 휴관이지만) 경복궁 쪽으로 가서 주변 돌담길을 걷는다. 내가 퇴사 후 서촌으로 이사한다고 하니 한 회사 선배가 "나도 예전에 사대문 안에 살아보는 게 꿈이었는데"라고 했는데, 역사에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괜히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 사는 양반처럼 어깨가 으쓱해진다(차기 대선주자들도 종로구민인 내 손에 달려있다!)


서촌이 조금 시끄럽고 복작복작하다고 느껴질 때면 인왕산 숲길, 자락실을 통해 부암동으로 피신가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인왕산 정상에 올라 뻥 트인 전경을 본다. 좀더 넓고 관광지 느낌을 받고 싶으면 경복궁을 지나 삼청동으로 간다. 한편 가끔 이전의 빌딩숲 도심이 그리울 때면 광화문쪽으로 가서 바쁘게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여유롭게 책을 읽기도 한다. 서촌은 내가 원하는 어디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풍류를 즐기는 한량처럼 


풍류가 넘치는 동네에 살고 계시군요.


독서모임을 같이 하는 한 친구가 내가 서촌으로 이사했다고 하니 한 말이다. 자기도 거기서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누상동에 가장 살고 싶었다고. 


누상동, 누각 위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다. 이름부터가 멋지다. 집 근처에는 바로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할 정도로 조선시대 때부터 절경으로 손꼽히던 명승지인 수성동 계곡이 있다. 이런 픙류 넘치는 동네 분위기 때문일까. 서촌에는 예로부터 윤동주, 이상, 이중섭 등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몰려 살았다고 한다. 사실 서촌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해진지는 좀 지나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 나 혼자 이런 풍류를 독차지하는 느낌이다.


이런 게 백수의 분수에 맞는건지, 아니 오히려 백수일 때 즐겨야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서촌에서 하루하루 풍류를 즐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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