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원한의 크기

고깃국 한사발에 나라를 망치다 - 전국책

“결혼 축하한다.”

M이 불쑥 봉투를 내민다.

“축의금을 직접 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들었다.

“어. 고마워.”

“그럼 간다. 결혼식날 보자.”

M은 왔을 때처럼 무심하게 가버렸다.


M은 대학교1학년때부터 친구다. 입학해서 처음 사귄 친구이고 그 인연이 대학원까지 이어져서 내가 연구하는 연구실의 옆옆 실험실에서 학위를 하고 있었다. 활달하고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였다.


난 슬며시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일본지폐 열장이 들어있었다. 고마웠다. 난 학위과정 중에 결혼을 결심했고 변변한 벌이가 없었기에 결혼 후 힘든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 공부하며 염치없게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열장이면 십만원쯤 되려나? 아무튼 이돈이 부모님이 아닌 내 손에 들어왔으니 꽤 큰 도움이 되리라. 그나저나 일본돈이라니. 일본에 두달간 연구하러 갔다 오더니 그때 받은 돈인가 보다. 난 결혼준비와 논문 투고 준비 때문에 그 돈을 서랍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 서랍을 열다가 봉투를 발견했다.

‘아 이게 있었지.’

난 봉투를 열고 돈을 꺼내 다시 세어보았다. 열장.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지폐에 쓰여 있는 숫자가 천이 아닌 만이다. 그럼 십만엔이고 한국돈으로 백만원이 넘는 돈이다. 일본돈을 자주 볼일이 없으니 금방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 일개 학생이 축의금으로 백만원이라는 큰 돈을 넣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친구 축의금을 삼만원 정도 하던 때다. 정말 친한 친구면 오만원 정도할 것이고 그러니 십만원도 나에게는 과한 돈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백만원이라니.


나는 바로 M을 찾아갔다.

“야. 이거 뭐냐? 액수가 너무 크잖아?”

M이 빙긋 웃는다.

“아 그거?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돈 쓸 일이 없더라고. 거기서 생활비에 용돈을 주는데 남아서 그냥 가져왔지.”

나는 고맙다는 말 외에 달리 더 할말이 없었다. 정말. 정말 고마웠다.


중산(中山)국 왕이 수도에서 사대부들과 잔치를 벌였다. 이때 양고기국을 나눠 먹었는데 사마자기에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사마자기는 초나라로 달려가 초나라 왕을 설득하여 중산국을 치게 하였다. 초나라는 옛부터 강대한 나라로 소국인 중산이 대적할 수 없었고 결국 중산왕은 궁을 나와 피신을 하게 된다. 도망가는 길에 이미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홀연 두 명의 용사가 나타나 중산왕을 호위했다. 왕이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기에 나를 호위하는 것인가?”

그들이 답하였다.

“저희들의 아버지가 예전에 음식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왕께서 지나가시다 이를 불쌍히 여겨 식은 밥 한 덩이를 주셨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살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임종에 이르러 당부하시길 ‘만약 중산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죽음으로 보답하도록 하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왕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남에게 무엇을 베풀 때는 양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 곤액할 때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남에게 원한을 살 때는 그 깊고 얕음에 있지 않고 그 마음을 상하게 하는데 있구나. 내가 한사발의 양고기 국물에 나라를 망하게 하고 한 그릇의 찬밥에 두 용사를 얻었구나.”

- 전국책 (고려원, 임동석 역해, p 139)


누군가의 원한을 사는데 그리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 사람의 마음이 상했다면 그것이 비록 별 것 아닌 일처럼 보이더라도 원한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양이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은혜일 것이다.


직장인이 된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 M이 나에게 준 백만원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친구가 친구에게 그냥 줄 수 있는 돈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난 학생이었고 M도 학생이었다. 그렇게 쉽게 벌어들이고 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난 돈이 절실히 필요 했었고 M은 나의 절실함을 알고 그 큰 돈을 흔쾌히 주었다는 것이다. M은 그 이후에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일로 생색을 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난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M의 결혼식에 그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축의금으로 주었지만 난 아직도 부채를 느끼고 있다. 언젠가 M에게 힘든 일이 생긴다면 난 반드시 그의 옆에 있을 것이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주의해서 살펴보고 관심을 가지면 보이는 것들 그것을 살펴서 필요한 것을 주면 된다. 남의 원망을 듣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주의를 하면, 정말 그 사람의 마음을 살핀다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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