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심리 상담 후기
공황장애로 출근을 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에 심리상담 예약을 잡고 상담소에 갔다.
집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는데 아동 전문 상담소인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였다.
간단한 상담 내용을 작성하고 기다렸다.
몇 분 뒤, 푸근하고 인상이 좋은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상담을 하면서 오늘 회사에서 정신병자처럼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그게 왜 정신병자예요? 나를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주기 위해 소리지른 거 잖아요.
몸은 위급한 상황에서 소리를 질러서 주위 이목을 끄는 게 본능이에요.
윤슬님 몸은 윤슬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건데, 스스로를 정신병자 취급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네, 나는 날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왜 자꾸 자책하고 못 살게 굴었을까..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선생님은 7살 때로 돌아가 나에게 말을 걸라고 하셨다.
응? 할 말이 뭐가 있지. 나한테 말을 건다는 게 부끄러웠다. 심지어 선생님 앞에서,
근데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완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했다.
7살 때의 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7살의 나에게 존재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나를 아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회사로 향했다.
하지만 회사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서 내리자마자 다가오는 차들이 무서워서 주저앉아서 약을 복용했다. 약의 힘을 빌려 겨우 사무실에 들어갔으나, 한두시간 정도 흐르니 과호흡에 제대로 앉아있기도 버거워 책상에 엎드려있었다. 이사님은, 그 상태로 업무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퇴근하라고 하셨다.
아침이면 회사 주변을 서성이다 집에 돌아가기 일쑤였고, 오늘도 출근하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눈물만 흘렀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엄마는 "괜찮아질거야. 속상해하지마. 힘들겠지만 이 시간이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거야."라며 차분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몇일을 보내고 회사에 전화해 출근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2주간의 병가를 받았다. 2주간 푹 쉬었지만 여전히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도 힘들고, 소음에 민감해 버스를 타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그간 심리 상담도 받고, 한의원도 꾸준히 갔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지금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예민한 상태기 때문에 6개월 정도 푹 쉬면서 자율신경계를 회복시키고나서 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만성이 될 수도 있다면서.
고민을 하다가 퇴사할 작정을 하고 회사에 전화를 해서 의사 선생님 소견을 전했다. 회사에서는 일단 3개월 병가를 주고 그 뒤에 더 필요하면 3개월 준다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퇴사하고 쉬게 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덮쳤을텐데, 배려해주셔서 감사했다.
두번째 상담날이었다.
선생님은 날 보시더니 "더 예뻐졌네?"라고 말씀해주셨다.
기분이 좋았다.
상담을 하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말씀 드렸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눈물은 몸이 말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몸이 만들어내는 보석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내가 힘들 때마다 우는 이유는 어릴 때 관심을 받기 위해서 했던 행동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를 만났다.
고등학생 때 자주 갔던 밤하늘이 보이는 독서실 옥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의 나를 안아주고,
고마워. 수고 했어. 잘 될거야 걱정마 라고 말했다.
그 날은 기분이 좋아 울 것 같지 않았는데 눈물이 흘렀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이 많은 타입이라 작은 위로와 칭찬에 큰 힘을 얻는 나였다.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져서 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외면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무너져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을 마무리하고 나가기 전에 선생님과 허깅을 했다.
선생님은 내게 힘이 좀 생겼다고 하셨다.
상담 후 집에 와서 아빠를 물끄러미보다가 손을 잡고 죄송하다고 했다.
아빠 반응이 어떨지 몰라 조금 두려웠는데
아빠는 "아빠도 미안하다. 내가 서툴러서 널 힘들게 했네, 미안하다"고 하셨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번째 상담.
그 날도 그림 치료로 시작되었다.
비 오는 산을 그린 다음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그렸고
왼쪽 구석에는 어린 아이 세명이 흙탕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신나게 노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보슬비를 표현했는데, 소나기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내가 항상 모든 상황에 있어서 과대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 날은 10살의 나를 만나 대화를 했다. 그 때의 나를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펑펑 났다.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항상 부업을 하시던 엄마가 떠올랐다. 새벽이면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하고, 낮에는 밤을 깎고, 커텐에 비즈 박는 일을 하던 엄마.
선생님이 1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다.
“엄마가 너한테 관심을 주지 않아서 서운했던 것 같은데, 그게 아니야. 엄마는 항상 널 사랑해.
엄마도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야.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어. 어릴 때의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지?"
어린 나에게 엄마의 상황을 전달하고나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상담을 하다보니 생각의 전환이 매우 필요한 것 같았다.
부정의 안경을 벗어던지고 긍정의 안경을 써야할 시점.
나는 부정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탓에 있는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인지왜곡이 심한 상태였다.
회사는 답답한 곳이라는 나의 인식 또한 바꿔야했다.
회사는 나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감사한 곳이다.
나는 언제든 자유시간을 가지며 쉴 수 있고,
회사는 나의 커리어와 경험을 쌓는 기회를 주는 감사한 곳이다.
남는 게 시간. 나는 잠정적 백수였다.
정말이지 출근이 너무하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던걸까. 남들은 쉽게하는 출근이 내게는 꿈같은 일이라는 것이 속상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음과 몸 건강 모두를 챙겨야했기에 정말 오랜만에 책을 폈다.
공황장애와 심리학 관련 책을 읽었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걸까, 힘든 상황 속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장한 걸까, 작년에는 책을 펴도 머리에 내용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왠지 이젠 술술 읽혔다.
그리고 집 밖을 나오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던 내가 운동을 시작했다.
7년만에 수영장에 갔다. 괜히 신이나서 물에서 빙글빙글 돌며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싫어하던 등산도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등산갈 때도 있었고, 혼자 갈 때도 있었다.
등산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떤 아픔이 있어서 등산하는걸까?'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구나를 느끼며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등산할 때면 산 초입에서 '하.. 왜 또 이 고생을 하러 왔지' 생각이 매번들었지만 정상에 오를 때면 레벨업했다는 기분이 들어 등산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에너지가 조금 생겨났는지,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좀이 쑤셔서 국비 지원 교육을 찾다가 베이킹 수업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하고싶었던 베이킹. 손을 꼼지락 거리고, 반죽을 만들고, 빵 모양을 성형하고, 달콤한 향을 맡고.. 내가 직접 만든 따뜻한 빵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맛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쁨으로 가득찼다.
그렇게 2개월이 흘렀고, 대표님께 카톡을 받았다.(나를 채용해주신 이사님은 그 사이에 대표님이 되셨다)
잘 쉬고 있냐고, 다음 달에 복귀 가능하냐는 내용이였다.
나는 덕분에 많이 호전되었다고 다음달 복귀 예정이라고 답변드렸다.
참, 감사했다. 회사로 돌아가게 되면 도움이 되는 직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번에 다시금 공황장애를 겪고나니, 공황발작이 시작하기 전에 마음가짐을 잘 먹어야겠구나 싶었다.
발작이 시작되고 나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을 때는 나의 의지로만은 해결되지 않는다. 타인의 도움이 30%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극을 주어서도 안 되지만, 언제든 손 뻗는 곳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대기해주는 것이 참 감사하고 고마웠고 큰 도움이 되었다.
6회차의 심리상담이 끝나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눈물 나는 일이 거의 없고, 폭식증도 사라졌다. 연례행사처럼 명절에 과식을 해서 새벽에 응급실에 가곤 했는데 이제는 기름진 음식을 먹고싶다는 식욕도 많이 줄었다. 아마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허전한 마음을 먹는 것으로 달래오다가 허한 마음이 채워지니 식욕이 줄어든 것 같았다.
지금은 술과 카페인은 거의 먹지 않고 있다. 당류(초콜릿, 과자, 카페 음료) 또한 줄여나가야했다. 탄산음료도 이산화탄소로 만들어 혈관을 수축해서 과호흡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고보면 세상에는 영양가 없이 배만 불리는 의미없는 음식들이 즐비하다. 입이 즐거운 음식보다 나의 몸에 도움이 될 음식을 섭취하려고 노력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