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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May 16. 2018

전망 좋은 방, 전망 좋은 동네

네르하- 프리힐리아나

전망 좋은 방, 전망 좋은 동네     

네르하- 프리힐리아나  
   

11살 일기

좋은 일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무척 좋다. 그 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좋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한국 사람인 건 알고 계실까?      


9살 일기

형은 나만 싫어한다. 다른 사람한테는 잘해주면서 나한테는 맨 날 소리만 지른다. 이제부터는 나도 형을 싫어할 거다.

 


   

1박에 15유로를 더 주고 바다 전망이 있는 방으로 바꾸었다. 우리가 묵었던 객실 바로 앞방이었는데 일우 표현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우리 방이 지옥 같았어?”

“아니 그만큼 여기가 좋다고요.”

    

바다 방향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을 여니 파란색의 시원한 바다가 막히는 것 없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 앞에 놓인 넓은 테라스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뱃머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추가 요금이 전혀 아깝지 않은 멋진 광경이었다. 특급 호텔보다도 좋은 풍경에 한국에 혼자 있을 아내가 떠올랐다.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옆으로 아내도 함께 앉아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보았다. 아내는 분명 이 풍경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었다. 다음에는 꼭 함께 오기로 마음먹어 본다. 그런데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멀리 바다가 보이는 숙소

거래의 달인이 되다.


스페인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언덕 위 하얀 마을 ‘프리힐리이나’에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젤라또 가게가 보였다. 일우가 사달라고 며칠 동안 노래를 불렀던 가게였다. 전망 좋은 방으로 바꿔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일우의 손바닥에 동전을 얹어주었다. 형제는 '휙'하고 바람처럼 가게로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일우와 혁우의 손에는 예상보다 커다란 젤라또가 쥐어져 있었다.  혁우는 벌써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는지 입가에 하얀 크림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누나가 젤라또를 더 줬어요.”

“누나?”

“저기 가게에서 일하는 누나요.”

“왜 더 줬는데.”

“내가 유아 뷰티풀이라고 그랬거든요.”   

  

마드리드에서의 첫 구매 이후로 일우는 거래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내 것도 사 오라고 시켜야겠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 방향으로 올라갔다. 기념품 따위를 파는 잡화점과 옷가게, 작은 술집, 식당들이 골목길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플라멩코 장면이 촌스럽게 그려진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식당인 모양이었다. 점원이 가게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플라멩코 공연

    

“얘들아 플라멩코 볼까?”

“예! 보고 싶어요.”

“플라멩코가 뭔데요?”

    

일우는 대번에 오케이 했지만 혁우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가게로 막 들어가려는 점원에게 혹시 예약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점원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마도 이름을 적으라는 의미인 듯싶었다. 가격은 음료 포함 1인당 8유로였다. 보통의 플라멩코 공연 가격이 1인당 40유로 이상인데 비해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공연 시간은 내일 밤 10시였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예약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인터넷에서 위치를 확인했던 ‘프리힐리아나’ 행 버스 정류소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 여성분들이 옆에 있어 물었더니 자기들과 같이 타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밝은 미소와 친절한 태도가 그들의 젊음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요금을 기사에게 지불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수시로 비명을 지르며 꼬불꼬불 놓인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서는 언덕 위 마을 입구에 우리를 뱉어내었다.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온통 하얀색인 프리힐리아나 마을이 지긋이 굽어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꼬마기차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올라’하며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 아이들에게 운전기사 또한 환한 웃음으로 답해줬다. 기차를 타지 않고 지나가기가 사뭇 어색해진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표시된 요금을 지불하고 기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을 가득 채운 꼬마 기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정차할 때마다 스페인 억양이 짙은 영어로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영어가 잘 들리지 않던 나는 다른 관광객들의 표정을 보며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우리가 출발했던 네르하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하얀색 건물들이 지중해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을의 하얀빛과 지중해의 파란빛의 선명한 대조가 아름다웠다. 사람이 만든 건물과 신이 만든 바다는 거기 그렇게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프리힐리아나 마을의 꼬마기차


마을의 침입자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마을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빠, 힘들어요.”

“조금만 참자. 저기만 들르고 금방 내려갈 거야”

“아빠 재미없어요. 그냥 가요.”

“야! 너만 힘드냐? 아빠가 금방 간다고 하잖아!”

    

일우가 한마디 안 했으면 하마터면 내가 욱할 뻔했다. 어제 하루 종일 쉬다가 움직이려니 둘 다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그만 내려갈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까부터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층 집 옥상에서 화가 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의 정적을 깨고 있는 동양인 침입자들에게 잔뜩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너희들이 오기 전까지 이 동네는 정말 조용하고 좋았단 말이야.’


사나운 그의 눈빛이 우리에게 돌아가 달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뜻을 존중해 조용히 다른 골목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싫기도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관광객에 힘들어했을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관광객의 방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벽화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어느 마을도 떠올랐다.

     

“아빠, 저 할아버지 우리를 왜 노려봐요?”

“조용히 해. 네가 시끄럽게 굴어서 저 할아버지가 화 난 거잖아.”

“왜 형은 맨 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네가 지금도 시끄럽게 하고 있잖아!”

“얘들아, 조용하고 빨리 가자.”

     



골목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대문 중앙에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일우가 그 구멍에 얼굴을 갖다 댔다. 

    

“뭐가 보여?”

“아뇨.”   

  

그제야 구멍 위에 금액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전을 넣어야 무언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미 미끼를 물어버린 나는 투입구에 동전을 넣었다.


“뭐 보이냐?”

“그냥 인형들이요.”

“형, 나도.”

“자, 봐.”

“에이 시시해.”


정말 시시했는지 혁우가 금방 눈을 뗐다. 궁금했던 내가 눈을 대는 순간이었다.


“악!”

    

갑자기 내 머리 위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오줌 줄기처럼 떨어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은 안 맞고 나만 맞은 게 즐거웠는지 낄낄대며 웃어댔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이들이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구멍을 통해 문 안쪽을 보고 있으면 머리 위로 물이 떨어진다.


정원보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탄 네르하로 돌아가는 버스는 출근길 버스마냥 빽빽했다. 빨리 집에 가자는 혁우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찍 내려와 줄을 서지 않았다면 앉아가지도 못할 뻔했다. 몇 시간을 걸어 피곤하던 차에 혁우의 투정이 본의 아니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 되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리막 길이어서인지 서서 가는 승객들의 모습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갑자기 내 앞 좌석에 앉아있던 일우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백인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중심을 잃으며 쓰러지듯 주저앉는 모습이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우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자리에 앉아 올려 보고 있어서 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키가 커 보이는 일우였다.

    

 숙소로 오는 길, 우리는 마트에 들러 맥주와 이런저런 즉석요리들을 샀다. 모처럼 옮긴 바다 전망의 방에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열기 위함이었다. 고요한 지중해를 배경으로 아이들과 나는 환타와 맥주를 담은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파란 하늘에 번져 오르는 황금빛 저녁노을이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우리 만의 소소한 파티를 치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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