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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May 17. 2018

플라멩코와 피노키오

네르하

플라멩코와 피노키오

네르하

          

11살 일기     

오늘은 플라멩코 공연을 봤다. 춤추는 모습이 너무 멋지고 예뻤다. 나도 춤을 같이 췄는데 아빠가 잘 췄다고 칭찬해주었다.

      

9살 일기     

자는데 시끄러워서 너무 힘들었다.    

 


 

긴 휴식의 끝, 수업료로 10유로를 지불하다.         


‘네르하’에서의  긴 휴식의 마지막 날이었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서 이렇게 여유 있는 일정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네르하에서의 마지막 날인 오늘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날씨가 너무 좋아 론다 이후로 밀렸던 빨래를 다시 했다. 아이들과의 여행에 지쳐 있던 나의 마음도 밀린 빨래와 함께 햇볕에 널었다. 강렬한 태양 빛에 청바지며 티셔츠들이 바짝 마를 생각을 하니 마음마저 개운해졌다.

형제들 역시 떠나기가 아쉬웠을까?

 아이들을 숙소에 두고 시내로 나왔다. 내일 타고 갈 그라나다행 버스표를 사기 위함이었다. 승차권 판매소는 어제 ‘프리힐리아나’가는 버스를 탔던 정류소 바로 옆에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자 어른 하나와 아이 둘 표를 주문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직원이 내게 표 세장을 던지듯 건넸다. 표를 확인해 보니 모두 어른 표였다. 그가 거스름돈을 주기 전에 얼른 두 장을 돌려주며 어린이 표로 바꿔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는 나의 말에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쉬었다. 당황스러워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지만 뭘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혼잣말로 기분 나쁘게 중얼거리며 승차권과 거스름돈을 한꺼번에 주었다. 내가 모르는 스페인 말이었지만, 분명 좋은 말이 아니란 것쯤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기분이 상했지만, 표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인지라 받자마자 어린이 표가 맞는지부터 확인했다. 불안한 마음에 날짜와 시간까지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확인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내 뒤로 표를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거스름돈을 챙긴 후 숙소로 돌아갔다.

     

 호텔로 돌아와 표와 돈을 정리하는데 정확히 10유로가 모자랐다.


‘오는 길에 떨어뜨린 걸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표소 직원이 10유로를 주지 않은 것 같았다. 승차권을 확인하느라 거스름돈이 제대로 맞는지 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시 돌아가 그에게 10유로를 달라고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짜증을 내던 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순순히 돌려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는 나처럼 어리숙한 여행객을 상대로 계획적으로 거스름돈을 덜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농락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단, 이번 여행의 제1법칙이자 유일한 법칙인 ‘불행은 빨리 잊자.’를 적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거스름돈은 받는 즉시 잊지 않고 꼼꼼히 확인하기로 한다. 그에 대한 수업료인 10유로는 나름 적정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아빠,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 아냐. 배고프지? 나갈까?”   

  

여행이 길어지면서 눈치가 빨라진 일우였다.    

 

떠나려니 새삼 아쉬운 풍경들


내일 떠나기 위한 짐 정리를 모두 마치자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나왔다. TV에서만 보던 플라멩코 공연을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 살짝 흥분이 되었다. 붉은색 옷을 온몸에 두른 스페인 미녀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설렜다. 플라멩코 공연장은 초저녁에는 식당 영업을 하다가 10시가 되면 공연을 하는 장소로 바뀌는 방식이었다. 작은 홀 중앙에 무대가 있고 그 앞으로 열 개 정도의 테이블이 부채꼴 모양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무대가 잘 보이는 부채꼴의 정중앙에 앉을까 하다가 아이들이 기대 눕기 편하도록 왼쪽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공연시간이 길어지면 아이들이 잠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흥겨운 스페인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동안 손님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플라멩코 공연은 노래, 춤, 연주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늘 공연은 연주하는 이가 따로 없었다. 대신 남자 무용수가 그때그때 음악을 트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번쩍이는 금발을 뒤로 한껏 넘긴 남자 무용수가 자신의 발로 무대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따따따 딱 따따다닥”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구두굽이 바닥을 치자 내 심장도 함께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두 명의 여자 무용수가 무대에 나타났다. 남자가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자들은 발보다는 손을  더 많이 사용하여 춤을 췄다. 여성 무용수 두 명 중 한 명은 무대 경험이 많아 보이는 중년이었고 키가 큰 다른 한 명은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여자 무용수들은 중간중간 턱을 치켜든 채 시선만 아래로 던지는 플라멩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왜 이 춤이 플라멩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동작이었다. 일반적으로 춤의 한 종류를 의미하는 ‘플라멩코’라는 말에는 ‘건방진’이라는 뜻도 함께 있다고 한다.   

열정 가득했던 플라멩코 공연


공연시간은 중간 휴식시간까지 합쳐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네들의 열정과 체력에 감탄하느라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와 일우에게만 해당된 모양이었다. 혁우는 어느새 머리를 내 허벅지에 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피노키오 춤을 추다.


공연 막바지였다. 휴식시간인 줄 알았는데 중년 여성 무용수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손을 무대로 잡아끌었다. 내게도 손을 내밀었지만 내게 기대어 잠들어 있는 혁우를 가리키며 웃으며 거절했다. 하지만 일우는 결국 그녀에게 손을 잡혀 끌려 나갔다. 잡힌 손이 싫지만은 않은 듯 일우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우에게는 미안했지만 혁우가 잠 들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음악이 울리고 무용수와 관객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대로 불려 간 서양 사람들은 자연스레 리듬을 타며 과하지 않게 몸을 흔들었다. 배운 건지 타고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몸짓이 보기에 좋았다. 무대 구석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일우가 보였다. 경직된 모습이 마치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춤 못 추는 것도 나를 꼭 닮은 일우였다.  하지만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름 자신의 몸짓을 지어내고 있는 일우가 대견스러웠다. 더군다나 아빠도 없이 저 낯설고 어색한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일우가 혼자 애쓰는 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한 여성이 일우와 보조를 맞춰 주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일우에게 춤을 가르쳐줘야겠다. 무대 위의 저 사람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몸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배운다면 인생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음악이 끝나자 이마에 몽글몽글 땀이 맺힌 일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일우를 찾아라!

      

“힘들었지?”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나중에는 재밌었어요.”

    

일우는 벌써 자신만의 춤을 익힌 듯했다.

    




멋진 플라멩코 듀엣과 그들의 발소리에 맞춰 박수를 치는 피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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