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상평상 May 15. 2018

네르하, 제주, 그리고 바다

네르하



11살 일기

스페인 누나가 내려오는 나를 잡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지 않았다. 혁우같은 어린아이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손을 잡지 않아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9살 일기

다음에는 방에 혼자 남지 말아야겠다. 게임만 하면 안 무서울 줄 알았는데 혼자만 있어서 너무 무서웠다.  


 



오늘 오전 일정은 이름하여 ‘호텔 조식 먹기’였다. 그동안 몇 차례 호텔에서 묵기는 했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조식은 엄두도 못내 왔던 터였다. 다행히 이곳 네르하의 호텔은 조식을 포함한 패키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호텔이라 호텔 식당이 따로 갖춰져 있지는 않고 일반 식당을 아침 식사시간에만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 방 번호를 이야기하자 직원이 유쾌하게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서 조식은 매우 훌륭했다. 특히 베이컨과 계란, 빵들이 맛있었다. 형제들도 오랜만에 먹는 진수성찬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아빠, 우리 부자가 된 거 같아요.”

“야! 우리 원래 부자야. 삼부자.”

“에이, 그런 부자 말고요.”

“아빠는 치사해.”  

   

아마 혁우는 유치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한바탕 웃음 부자가 되었다.

     

아침 해를 맞는 유럽의 발코니 광장


식사를 마치고 네르하의 명소, '유럽의 발코니 광장'을 둘러봤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알폰소 국왕의 동상 옆에서 대포를 발사하는 사진을 찍으며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호텔 옆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의 끝에는 자그마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하얀색 집 몇 채가 바다를 그리워하듯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빨래 줄에 한가로이 널려있는 몇 개의 빨래와 말린 생선들이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금방이라도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검게 그을린 피부의 거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우리는 네르하 바다를 지키는 해군들이다!


아이들, 지중해와 친구가 되다.


바다를 보았다. 제주에서 항상 보아왔던 바다는 이곳에서는 다른 얼굴이었다. 바다의 넓이에서 오는 차이일까? 태평양과 지중해는 같은 바다지만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잔잔하기 짝이 없는 지중해의 모습은 바다라기보다는 거대한 강 같았다. 잔잔히 밀려들어오는 파도의 모습에서는 수줍음마저 느껴졌다. 제주도 특히, 중문 바다의 거친 파도와 비교하면 ‘네르하’의 파도는 아기의 속살같이 야리야리했다.


아까부터 아이들은 파도와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기 전부터 뛰면 될 것을 아이들은 일부러 파도가 발 앞까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뛰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저 광활한 바다조차 친구였다. 이마 위로 부서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아이들의 모습마저 삼켜버렸다. 고요한 해변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파도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형제들


 모처럼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 또한 숙소에서 아직 정하지 못한 남은 일정을 계획하기로 했다. 평온한 느낌이 마치 제주의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숙소 앞 광장에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가 시간의 경과를 규칙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성당의 종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려니 당장이라도 성당에 가서 기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계가 귀하던 옛날, 성당의 종소리는 시계의 역할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숙소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광장


아이들은 한국의 천 원 샵에서 사 온 짝퉁 ‘부루마블’ 게임을 펼쳐놓고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혁우의 말이 게임판 위의 마드리드 칸에 도착했다. 마드리드 증서를 갖고 있던 일우가 신이 나서 혁우에게 숙박비와 통행료를 받았다. 기껏 스페인까지 와서 한다는 게 세계 여행 게임이라니? 잠시 실소가 나왔다.

    

 “방문 잘 잠그고 아무에게도 열어주면 안 돼.”  

   

숙소에 혼자 남아 게임을 하겠다는 혁우를 두고 일우와 나는 저녁 산책을 나왔다. 광장 왼쪽으로 나 있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내려갔다.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길 중간중간에는 낮은 절벽들이 작은 탑들처럼 솟아 있었다. 관광객들과 산책 나온 시민들이 절벽 위에 올라 자신들의 모습을 휴대폰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일우 역시 절벽 위로 오르겠다고 했다.

    

저녁 무렵의 네르하 광장


“아빠도 같이 올라가요.”

“아빤 여기서 네 사진 찍어 줄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절벽을 보면 성큼성큼 올라갔던 나였는데, 이제는 아이의 제안에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몇 달 전 여행에서 다친 발목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전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가벼운 동작으로 절벽 위에 올라 만세를 하고 있는 일우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평소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를 듣던 일우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나를 닮아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사진 속 아버지도  저런 모습이었던가? 이국의 바닷가에서 느껴지는 핏줄의 힘이 새삼스러웠다.

에베레스트라도 오른 듯한 일우



절벽을 조심조심 내려오는 일우의 모습이 아까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저것도 유전인 걸까? 마침 절벽 밑에 있던 스페인 여학생이 일우의 내려오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일우는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그녀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스페인 여학생의 예쁘장한 얼굴에 살짝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짜식, 저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조만간 펼쳐질 일우의 연애 인생 역시 수월하진 않을 듯싶다.    


이전 08화 문화일까? 무시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