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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May 13. 2018

두 얼굴의 누에보

누에보 다리- 파라도르 호텔

두 얼굴의 누에보


누에보 다리-파라도르 호텔     


11살 일기

비가 와서 나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아빠 혼자 가는 게 걱정되어 같이 나왔다. 밤에 본 누에보 다리는 환상적이었다. 나오길 잘했다.     


9살 일기

비가 와서 나가기 싫었다. 그런데 형이 무서워서 방에 못 있겠다고 했다. 겁쟁이 형 때문에 나도 나가야 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어제부터 새 학년이었다. 일우는 4학년, 혁우는 2학년이 되는 것이었다. 학교를 갔어야 할 시간에 이 먼 곳에 와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학기 중간에 복귀하게 될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여행을 떠난 지도 어느새 20일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지칠 법한 일정임에도 아이들은 매우 즐겁게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을 향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듯함과 보람 같은 것도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분과는 반대로 창밖은 아침부터 세찬 비가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유럽에서 처음 보는 소나기였다. 나는 날씨를 핑계 삼아 쉬기로 했다. 보통 당일치기 일정이 많은 론다에서 2박 3일 일정을 채우는 것이 부담이었는데 다행히 날씨가 도와주고 있었다.   

   


정오쯤 비가 소강상태를 보였다. 마트에서 장을 본 후 말라가행 버스표를 사기 위해 터미널에 들렀다. 내일 목적지인 네르하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말라가에 도착해야 했다. 매표구 직원에게 어른 한 명, 어린이 두 명 표를 달라고 했는데 그냥 성인표 세 개를 줬다. 어린이표는 없냐고 다시 물으니 창구직원이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며 없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 이 같은 불친절을 겪는 게 처음도 아니어서 많이 당황하진 않았지만 찜찜한 뒷맛은 어쩔 수 없었다. 창구 옆에서 표를 확인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 다음 사람에게도 무뚝뚝하게 표를 던지듯 건네는 장면이 보였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안도가 되었다. 나만 차별당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때문이었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불행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불행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불친절은 그냥 이곳의 문화 중 일부인 것인지도 몰랐다.  승차권에 적혀 있는 날짜와 시간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이상 없이 구입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한국에 돌아가서는 우리나라의 친절한 서비스에 조금 더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 오는 론다 거리에서

 우산이 없던 우리는 비라도 다시 올까 싶어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다음 일정을 계획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휙 휙 사나운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많이 접했던 요란한 바람이 론다의 거리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칫하면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구경하려던 계획이 틀어질 참이었다.


"시끄러우니까 살살 좀 놀아!"


공연히 잘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바람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도 잦아들지 않었다. 하지만 이대로 누에보의 야경을 보지 못한 채 떠난다면 많이 섭섭할 것 같았다. 결국 아이들과 함께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거리로 나왔다. 집에 있는 게 더 무섭다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누에보 다리로 가는 길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나운 풍경이었다. 아마 날씨를 담당하는 신이 있다면,  오늘 그의 얼굴은 아까 만났던 터미널의 직원과 매우 닮았을 것 같았다.


어제 낮, 낭만적인 기타 연주가 울려 퍼지던 전망대의 캐노피는 사납게 내리꽂는 빗줄기와 휘몰아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위태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파라도르 호텔 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어제와는 다르게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사나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만 내 손을 벗어나 장난을 치려 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나려다가도 비바람도 놀이로 만드는 아이들의 재주에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비바람이 부는 론다 전망대


수많은 조명을 받아 붉은빛이 번져 오르는 누에보 다리가 낮과는 다른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세찬 비바람에도 다리를 밝히는 아름다운 조명 빛이 흩날리는 빗방울들을 영롱한 보석으로 만들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파라도르 호텔의 회랑 아래로 숨었다. 관광객 몇 명이 뿜어대는 담배연기가 무심하게 하늘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에보 다리의 야경


조명에 비친 빗방울들




아이들 학교 공부 

 

초등학교의 법정 수업 일수가 보통 190일 에서 195일인데 그중에 3분의 2 이상을 출석해야 초중등 교육 시행령에 나와 있는 정원 외 관리 대상자가 되지 않는다. 의무교육인 초등 중등에는 자퇴나 제적이라는 개념이 없이 정원 외 관리라는 형태로 해당 학교에서 관리한다.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는 유급 또한 정원 외 관리 대상이다. 

     

또한, 가정 체험 학습으로 학교장 허가를 받으면, 한 회당 10일까지 토요일, 일요일을 포함하면 2주 정도의 시간을 결석 일수에서 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방학기간과 체험학습기간을 제외하면 6주, 토요일 일요일을 뺀 날짜로는 30일 정도 결석해야 했다. 아내는 기간을 좀 단축하는 게 어떻겠냐며 나를 설득했으나 산티아고 순례 길과 유럽여행을 한꺼번에 가보겠다는 나의 욕심을 꺾지는 못했다. 아이들의 공부와 학교생활 또한 걱정되었던 아내는 아이들에게도 물었다.

 

“갔다 오면 학년이 바뀌어 친구들도 모두 바뀔 텐데 괜찮겠어?”

“힘들겠지만 한 번 다녀와 볼래요.”

“응 이번에는 형이랑 아빠랑 다녀올 테니 혁우는 엄마랑 같이 있으면 어때?”

“아니, 나도 아빠랑 형이랑 같이 갈래.”

“힘들 텐데.”

“그래도 갈래요.”


사실 말이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간다는 거지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에게 미루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초등생 자녀와 유럽여행을 떠난 어떤 엄마는 아이들 공부가 걱정이 되어 매일 풀 수 있는 수학 문제집을 가지고 갔다는데 나는 고민 끝에 그냥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길고 긴 아이들의 인생에서 이 시기는 잠깐일 것이고 공부는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여러 개의 재능 중 하나일 뿐이라는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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