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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May 23. 2018

반가운 제주 누나

알바이신 지구- 산 니콜라스 전망대

반가운 제주 누나 

    

11살 일기

제주도 누나를 만났다. 스페인에서 제주도 사람을 만나다니 너무 기뻤다. 제주도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다.

     

9살 일기

제주도 누나를 만나서 좋았다. 누나가 사 준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었다. 한 개 더 먹고 싶었는데 아빠가 안 사줬다.   

 


 

 

오늘은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서 짐을 싸야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벅찬 일정이 될 터였다. 버스를 타고 말라가까지 갔다가 거기서 기차로 갈아탄 후 마드리드에서 내려 다시 바르셀로나 행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이곳 그라나다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다니는 야간열차가 운행이 중단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까닭에 급하게 고안한 방법이었다. 오전 7시에는 여기서 출발해야 오후 7시가 넘어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 말라가로 이동해 그곳에서 1박을 한 후, 여유 있게 기차를 타고 갈까도 싶었지만 만만치 않은 말라가 시내의 숙박비 때문에 그러기는 힘들었다. 또한, 이미 예약한 이곳 숙박비와 내일 말라가행 버스비를 포기하기에는 예산상 출혈이 너무 컸다.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를 잇는 야간열차가 중지된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야간열차 타고 싶었는데....."

"기차 이층 침대에서 잠자고 싶었는데......"


아이들 역시 한 마디씩 하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라나다의 시초, 알바이신 지구


오늘은 ‘사크로몬테’ 언덕 위에 있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를 가보기로 했다. 어제 알람브라 궁전에서 바라봤던 바로 그 언덕이었다. 언덕의 전면에는 하얀색의 집들이 가득한 알바이신 지구가 있었다. 오늘은 그 언덕에서 반대로 알람브라 궁전을 볼 차례였다. 알람브라 궁전이 없었다면 그라나다는 어땠을까?  문득, 그라나다 시민들은 알람브라 궁전을 건설한 이슬람 사람들과 그 궁전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미국인 ‘워싱턴 어빙’에게 조금은 감사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로 강을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으니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펼쳐졌다. 3월이지만, 스페인 한낮의 태양은 우리나라 한여름의 그것 못지않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낮은 집들만이 이어진 알바이신 지구에서는 그늘을 찾기조차 힘들었다. 이글거리는 한낮의 태양이 우리들의 뒤통수를 따라다니며 열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아빠, 너무 더워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아이들도 더위가 힘들었는지 아까부터 계속 아이스크림 타령만 하고 있었다.

오르막 길이 이어진 알바이신 지구

 알람브라 궁전이 생기기 전까지 왕궁이 있던 곳이라는 알바이신 지구는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이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은 이곳에 군사 요새를 만들었고, 그 요새는 훗날 커다란 도시로 번성하였다. 그라나다는 바로 이 알바이신 지구에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를 후원한 이사벨 여왕이 이끄는 가톨릭 세력에 의해 정복당한 후로는 알바이신 지구는 추방당한 이민자와 부랑자들이 사는 쇠락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곳 알바이신 지구의 밤거리는 소매치기와 강도 등의 범죄로 위험하다고 한다.

 

전망대의 전경이 언제나 그렇듯 산 니콜라스 전망대의 탁 트인 풍경은 올라오며 들였던 노력과 고통을 보상해 주고 있었다.  녹지 않은 눈이 구름처럼 펼쳐진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붉은빛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운 풍경은 입술로 스며드는 땀의 짠 내마저 잊게 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알람브라 궁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한국인 여성이 우리 세 남자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별로 없어 아쉬웠던 차에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현재 코르도바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놀라웠던 건 그녀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사실이었다. 제주도가 집이라는 말을 들은 일우와 혁우 역시 너무도 반가워했다. 


불행히도, 그녀는 몇 달 전 이곳 알바이신 지구에 관광을 왔다가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찾기를 포기하고 있던 차에 며칠 전 경찰로부터 지갑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라나다 경찰서에 들러 지갑을 찾은 후, 지난번 소매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감상하지 못했던 전망대를 다시 찾은 길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지갑의 내용물은 현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상이 없었다. 


가방 지퍼를 꼼꼼히 닫았음에도 없어졌으니 단순한 분실은 아니었을 터였다. 갑자기 전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갑과 여권이 들어있는 가방의 잠금장치를 다시 점검했다. 여권이나 지갑을 소매치기당하면, 금전적인 손해도 손해지만 여행이 중단될 수도 있었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고향 사람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었기에 함께 내려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성 니콜라스 전망대 광장의 여유로운 풍경

     

오랜만에 들뜬 아이들이 그녀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누나는 무슨 공부해요?”

“응 스페인어.”

“그럼 스페인어 잘하겠네요?”

“응 열심히 하고 있어.”

“우리 아빠는 스페인어 못하는데.”


한국 사람만 만나면 녀석들은 바로 남의 자식이었다. 그녀가 안내해준 젤라토 맛집 ‘로스 이딸리아노’에서 바나나 아이스크림 맛보았다. 스페인어로 주문을 능숙하게 하는 모습이 우리말을 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말을 할 땐 소녀같이 여리게만 보였는데 스페인어를 할 때는 또박또박 당찬 기운이 가득했다.


"아빠, 하나 더 사줘요."


 우리 입맛에는 너무 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혁우의 입맛에는 딱 맞는 모양이었다.  

   

 타파스로 유명한 시내 맛 집에 가서 식사를 할까 하다가 코르도바로 돌아가는 그녀의 버스 시간을 감안해 숙소 근처 캄필리오 광장의 케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제저녁 식당 야외 테이블에 손님이 가득한 걸 보았기에 맛집인가 싶어 들렀는데 맛이 영 없었다.  손님이 많았던 이유는 단지 저렴한 가격 때문인 듯했다. 모처럼 먼 타국에서 공부하는 고향 사람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그녀를 배웅하려고 정류소에 함께 서 있는데 갑자기 일우가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양이 너무 많아 피가 그치지 않았다. 오늘따라 휴지마저 못 챙기고 와 얼굴과 옷에 피가 많이 묻었다. 난감했다. 다행히 휴지를 가지고 있던 그녀가 아이의 코를 막고 피가 묻은 곳을 닦아 주었다. 맛없는 점심에 이래저래 민폐만 끼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되어 버린걸까? 


숙소로 돌아오던 중 그녀와 식사를 하면서 나눴던 말들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길 바래요.”

“부모님이 반대해도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가세요.”

“연봉만 보고 진로를 선택하지 마세요.”

    

불안한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무심코 뱉었던 말들이 떠오르며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냉혹한 현실에서 꿈만 바라보고 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정작 그녀와 비슷한 시절 나는 또 어떠했는가? 용기를 내기는커녕 현실의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해 갈팡질팡하지 않았던가? 책에서 읽거나 방송에서 주워들은 막연한 이야기들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뭐라도 된 양, 마구 쏟아낸 사실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어느새 나도 상대방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늘어놓는 꼰대가 되어 버렸군.’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내게 같은 고민을 얘기했을 때도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내게 고민만 털어놓아줘도 나는 성공한 아빠일 것이다. 혹시라도 그때가 내게 온다면, 이번처럼 충고랍시고 나의 말만 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 기울여주는 아빠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휴지를 코에 박은 채 혁우와 놀고 있는 일우의 얼굴이 웃프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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