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마트나 시장에 갈 때나 관공서나 은행, 당근거래를 하러 갈 때도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편이다. 그날도 나는 버스로 두 정거장인 곳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알뜰한 나는 왕복 차비 삼천 원을 아낀 흐뭇함을 느끼며 룰루랄라 자전거를 한참 타고 달리는데, 맞은편에서 네 발 자전거를 탄 어린이와 마주쳤다. 뒷바퀴 옆에 보조 바퀴 두 개가 달린 어린이용 자전거였다.
어린이는 이제 막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듯, 핸들과 바퀴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 옆에 아이의 엄마가 자전거의 속도에 맞춰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를 먼저 발견한 아이의 엄마가 앞에 자전거가 있다며 어린이를 조심시켰다. 나도 어린이의 자전거를 피해 옆으로 방향을 틀며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나의 자전거와 엇갈려 지나치던 어린이는 자기 엄마에게인지 나에게인지 모를 말을 했다.
할머니도 자전거를 타네?
할머니도 자전거를 타네, 라니. 할머니라는 단어가 훅 긁고 지나갔다. 아니, 어린이가 탄 자전거 바퀴가 마음에 시꺼먼 바퀴 자국을 남겼다. 내가 할머니라니. 나는 어린이의 말에 상처받았다. 볼일을 보고 집으로 오는 내내 할머니라는 호칭이 내내 걸렸다. 아니, 어떤 어린이는 이웃집 순이가 자기 엄마더러 할머니라고 불러서 잠이 안 온다는데, 심지어 할머니 소리를 직접 들은 당사자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당연히 약이 오르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울 앞으로 갔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피부 관리를 소홀히 했으니, 그 사이 피부 상태가 엉망이 되었나, 아니면 화장이 나이 들어 보였나. 진한 메이크업이 나이 들어 보인다는데 평소 짙은 색 립스틱을 선호하는 화장법을 바꿔야 하나. 이제부터 빨간색 립스틱 말고 마른 장미색 틴트를 바르고 다닐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뷰티 인플루언서 동영상을 보며 젊어 보이는 화장법을 배워야 하나. 아니면 피부 관리실에 회원권이라도 끊고 본격적으로 관리해야 하나. 바늘공포증을 꾹 참고 피부과에서 실을 넣어 팽팽하게 당기거나 주사를 넣어 부풀려야 하나. 일단, 오늘 밤부터 1일 1팩이라도 빠뜨리지 말자.
한때 동안의 아이콘이었던 나. 네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외출하면 나를 동생으로 오해하는 일도 많았다. 뿐인가. 20대를 지나는 동안, 10대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만삭일 때, 학생 소리를 들었으며,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신물 나게 들었다. 너무 들어서 나는 망각하고 있었다. 영원히 동안 소리를 듣고 살 줄 알았다.
어린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거울 속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면 역시 나이 들어 보인다. 이제는 아무리 후하게 보려고 해도 영락없이 50대 후반이다. 그렇더라도 아줌마라고 불렸지, 할머니라고 불릴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줌마라는 호칭에 겨우 익숙해졌는데, 이제 할머니라는 호칭을 받아들여야 하다니. 역시 저속노화에 대해 신경 쓰고 피부에 좋은 것들을 챙기고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그렇지만 어린이의 눈은 정확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의 눈에 나는 결코 아줌마가 아니다. 확실한 할머니였다. 그러니까 내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어린이의 할머니가 아마도 내 나이 또래이지 않을까 싶은 설득력 있는 명제가 떠오른 것이다.
어린이는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어린이였다. 그리고 어린이와 나란히 걷던 그 애의 엄마는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다. 스물아홉 살인 딸이 일찍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다면 나는 지금 할머니 소리를 듣고 있을 터였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자녀를 결혼시킨 한 친구는 할머니이다. 두 돌이 지난 손녀딸이 있다. 친구가 보여준 휴대폰 속의 사진으로만 봤지만, 나를 만난다면 그 애도 나를 할머니라고 부를 것이다. 설마 할머니의 친구를 아줌마 또는 이모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꿈을 얼른 깨자.
아직은 아줌마로 더 많이 불린다. 아니다. 정확하게는 자전거를 타던 어린이에게서 처음 들었던 할머니라는 호칭을 그 이후 들은 일이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 또 생길 것이고, 자주 생길 것이고 어느 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할머니라고 불려도 더는 약이 오르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나는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가는 경계가 혼란스러웠듯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가는 경계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체성의 변화를 겪으며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고 할머니가 되었나,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처음 들은 할머니라는 말이 충격이었지 두 번째 듣는 할머니 소리는 덜 충격적일 것이다.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넘어갈 때,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덕분에 견딜 수 있었듯이 이제 할머니로 가는 경계에 선 나는, 또다시 이 시기를 견딜 사랑이 있다. 그 대상은 바로 나.
역할과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워지고 있다. 차츰 나에게 집중하며 경험한 모험과 도전,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성숙해지는 관계들 덕분에 나는 할머니로 가는 길이 두렵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할머니 소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후 결심했던 1일 1팩은 작심삼일로 끝났다. 주름과 기미는 그대로이고 귀찮은 날엔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 잠을 잔다. 안 되겠다. 할머니 소리는 듣더라도 피부 좋은 할머니 소리를 듣기 위해 오늘 밤엔 더위에 지친 얼굴에 시원하게 마스크팩이라도 올려야겠다.
뷰티 인플루언서의 릴스에서 본 꿀팁 하나를 공유하겠다. 깨끗이 씻은 오이를 반으로 잘라 얼린다. 그리고 달아오른 피부에 잘린 단면을 마사지하듯 문지른다. 충분히 마사지한 후, 사용한 부분은 잘라내고 다시 얼린다. 생각만 해도 시원하고 모공이 수축되는 기분이다. 오늘 당장 오이를 얼리겠다. 오이 한 개를 피부에 양보하겠다. 그리고 미인은 잠꾸러기라는데 올빼미처럼 밤에 돌아다니는 습관도 줄이고 수면의 질도 높여야겠다. 이 결심은 과연 며칠이나 갈까, 작심삼일일까, 아니면 작심사일이나 작심일주일쯤? 미심쩍기는 하지만, 피부 좋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일단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