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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 아니고 마녀입니다

by 함지연

13회 차 워크숍에 참여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13주 동안, 센터에 가서 배우고 있다.

2회 차 강의 시간에 강사님은 워크숍 기간 동안, 사용할 별명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검사를 통해 알게 된 자신의 강점과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이용해서 사자성어처럼 네 글자의 별명을 강의 시간 동안, 고심하고 결정한 후, 별명에 대한 설명을 돌아가며 발표하는 것이다.


과제로 미리 했던 성격강점 결과는,

심미안, 호기심, 진실성, 학구열, 창의성의 순서대로 강점이다. 부족한 점은 신중성과 용서와 자비, 사랑이라는데, 앞뒤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요즈음의 내게 신중성이 부족하다는 결과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용서와 자비는... 인정. 지금의 나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물론 강점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변하기도 한다니, 내년쯤 다시 검사하고 나올 결과가 궁금하긴 하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점인 심미안과 호기심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내게는 지속하고 싶은 강점이며 호기심 역시 그렇다. 호기심 때문에 새로운 것을 기웃거리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으니까. 호기심이 없었다면, 7월부터 9월까지 가장 뜨거운 날씨에 대중교통으로 삼십 분 이상 걸리는 곳으로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고지식해서 결석할 생각은 꿈에도 없으며 꾸역꾸역 출석할 것이 분명하니까.


생각보다 네 글자로 별명을 짓는 일은 어려웠다. 어떻게 해도 네 글자보다 더 길어졌다. 주어진 시간 안에 드디어 결정하고 목걸이용 이름표에 적고 보니 꽤 그럴듯했다. 나 창의성도 진짜 있는 듯?

결정 못한 몇몇 수강생은 강사님 찬스로 모두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오픈 채팅창의 이름도 별명으로 변경했다.

2회 차 수업에서 결정된 나의 새로운 이름은, 탐구 마녀다.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자 이름표를 들어 모두에서 보여주었다. 반듯하게 쓰지 않은 글씨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강의실에 있던 이들은 마녀를 미녀로 오해했다.

미녀 아니고 마녀입니다.

나는 정정했다. 그런데 또다시 오해를 했다. 미녀가 아니라 왜 하필 마녀인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나는 공주 캐릭터를 좋아했다. 공주가 주인공인 만화와 동화에 열광했다. 아름다운 공주와 함께 울고 웃고 설렜다. 도화지에 프릴과 보석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은 공주들을 열심히 그려댔다. 그 많은 공주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주의 순위를 정하며 누구를 일등으로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침내 아름다운 공주와 멋있는 왕자가 해피엔딩을 맞이하면 덩달아 행복했다. 공주의 행복을 축복했다.


비호감이었던 마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자녀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무렵이다. 세대가 바뀌었어도 역시나 두 딸은 공주에 열광했다. 온갖 공주 이야기를 딸들에게 읽어주었다. 공주계의 전설인 백설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라푼젤은 내가 어릴 때나 내 딸이 어릴 때나 존재감이 상당했다. 그리고 새로운 공주 캐릭터도 대거 등장했다. 아이들의 책꽂이에는 심지어 공주 백과사전까지 있었다. 딸들은 반짝이는 플라스틱 왕관을 쓰고 알록달록한 빛이 나오는 요술봉을 들고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를 입고 공주가 주인공인 동화책을 읽었다.


그때 공주가 주인공인 식상한 이야기 사이에 마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심지어 인기가 있어서 시리즈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바로 마녀 위니. 지금은 20권쯤 되었을 시리즈의 첫 번째 그림책은 ‘마녀 위니’다. 나는 마녀 위니에게 푹 빠져서 한참 동안, 소장했다. 위니 덕분에 나는 마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공주님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혐오스럽고 흉측하게 생긴 그 마녀들은, 실은 삽화이거나 만화를 그린 사람의 상상이 만들어낸 작품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자란 사람들 머리에는 만화영화에서 본 마녀 캐릭터의 강렬한 모습만 각인된 것이고. 마치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는데, 비 크리스천조차 예수님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장발의 백인 남성의 모습처럼.

마녀 위니는 긍정적이고 따듯하고 부지런하고 뭐든 열심히 한다. 반려묘인 윌버에게 다정하다. 마녀 위니를 사랑하게 되면서 다른 마녀들에 대한 편견도 마녀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도 바뀌었다. 나는 마녀를 흠모했다. 마녀가 되고 싶었다. 수동적인 공주들에 비해 마녀는 얼마나 능동적인가. 다양한 재료들을 모아 마법의 약을 제조하는 그녀들은 얼마나 총명하고 창의적인가. 키스를 해 주러 올 왕자를 백 년 동안 기다리는 공주에 비해 마녀는 혼자서도 자신의 인생을 잘 산다. 그녀들은 계속해서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낸다.


왕자와 결혼에 성공한 공주는 자신의 정체성은 상실한 채 아내와 엄마 역할에 충실했을 것이다. 아들과 딸을 낳고, 긴긴밤, 레이스를 뜨고 있을 동안에도 마녀는 성장한다. 거듭거듭 성장한다.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새로운 묘약을 만든다. 점점 센 마녀가 된다.


그러는 동안 공주들은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자라 품을 떠난 이후, 젊음이 지나며 외모의 아름다움도 사라졌을, 그리고 그 시절 힘 있는 남성들에게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으니, 왕자에게는 계속 새로운 여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은 식고 이제 주름이 가득한 공주는 왕자의 젊고 아름다운 애인들을 질투하며 노년의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왕자도 공주는 마녀를 극혐 한다. 왕자와 공주와 마녀가 살던 세계도 마녀를 혐오한다. 어쩌면 마녀의 부모나 가족도 그녀를 부인했을 것이다. 마녀는 깊은 숲 속으로 쫓겨나거나 굴속에 은둔하거나 잔혹하게 죽는다. 마녀사냥은 가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했다. 순종적이지 않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한, 기존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야말로 밉상인 마녀들은 산채로 불에 태워졌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잔다르크 역시 마녀사냥을 당했다. 전쟁 영웅이었던 그녀는 마녀로 지목되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제는 백설공주가 아니라 마녀가 주인공인 영화도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더 다양한 마녀 이야기를 원한다. 내가 속한 세계에 더 많은 마녀가 있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았으면 좋겠다. 마녀들끼리 연대하고 함께 연구하고 함께 성장하는 세계. 상상만으로도 신난다. 나는 마녀가 되겠다. 그리고 늙어서는 마녀 할머니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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