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친구 S가 새로 이사한 곳은 경기도 북부에 있는 금촌이다. 출근시간대에 경기중앙선을 타고 S를 만나러 갔다. 내 집 문 앞에서 친구 집 현관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긴 시간, 전철 안에서 금촌이라는 지명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금촌이 배경인 농촌 드라마가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코미디언 이영자가 금촌댁, 홍진경이 딸로 출연했었는데, 내 친구가 바로 그 금촌댁이 되었다.
S의 언니가 파주에 살았다. 친구는 언니 가까이로 가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 그러더니 말한 것처럼 차로 10여분이면 오가는 거리에 정착했다. 나와 알고 지내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이사를 했던 친구는 더는 이사를 다니지 않게 되었다. 집들이 선물로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책 선반을 미리 보냈다.
받아라, 무거운 휴지.
독서 중인 책 몇 권과 소지품이 놓인 책 선반은 친구의 침대 바로 옆에 있다. 침대에서 뒹굴며 손만 뻗으면 책을 집을 수 있다.
집 구경을 마치고 친구의 그림도 감상하고, 친구의 침대에 누워 개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다 멈추면 더 하라고 앞발로 툭툭 쳤다.
이날, 우리는 S의 집과 S의 언니 집 두 군데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S가 금촌으로 이사하기 전부터 언니는 계속 나를 초대했었다. 그냥 놀러 오라는 것도 아니고 와서 자고 가라는 것이다.
언니가 와서 자고 가래.
나는 이 말을 S에게서 여러 번 들었었다. 그렇지만 파주는 멀고, 내가 친구 집도 아니고 친구 언니 집에 가서 자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내향인 맞고요, 낯을 아주 많이 가려요.
그렇지만 나는 S와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S의 동생 집에서 잤던 경험이 있다. 동생이 없는 동생 집에서. 한강이 가까운 오피스텔이었는데, 친구의 동생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심지어 나는 동생을 만난 일도 없다.
그거 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집에서 잠도 자면서 무슨 낯을 가리고 무슨 내향인,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맞다니까요. 내향인.
그동안은 멀어서라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S의 집에 간 김에, 언니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금촌까지 왕복 4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서 언제쯤 언니네 집에 갈지를 정해야 했다. S의 집에서 수다를 떨며 노는 동안, S의 언니는 계속 언제 오냐는 문자를 보냈다. S의 형부는 처제의 친구가 온다니 전날, 화장실 청소를 했다.
S의 언니가 사는 곳은 전원주택 단지였다. 그림 같은 집들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잔디가 깔리고 그네가 있는 넓은 마당과 울타리. 세모난 지붕이 있는 이층 집들. 비를 맞은 능소화 꽃잎이 뚝뚝 떨어져 있고 포도알이 영글고 있었다. 사람보다 먼저 멀뚱한 표정의 고양이들이 보였다.
그림 같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S의 언니가 만들어준 웰컴드링크를 마시고, 집 구경을 했다. 새벽에 일을 나갔다가 일찍 퇴근하는 S의 형부는 평소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방으로 피했다고 했다. 이유는, 내가 불편할까 봐.
나도 맥시멈리스트이지만, 지금 사는 공간의 한계로 더 늘리지는 못했는데, 언니는 진정한 맥시멈리스트였다.
일단 고양이부터 맥시멈이다. 고양이를 위한 방이 따로 있는데, 고양이를 위한 공기청정기와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다. 고양이 화장실만 다섯 개다. 그리고 마당에는 밥을 챙겨주는 길고양이도 여럿 있다. 놀라지 않게 조심하며 뒷마당 으슥한 곳에서 새끼들을 품고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서울에 살 땐 스무 마리가 넘었는데, 구조했던 유기묘들인지라 아픈 곳도 많고 나이도 많아 고양이 별로 떠나고 이제 열세 마리만 남았다.
안타깝지만, 내게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 조금 지나자, 어김없이 코가 간질간질해지며 콧물이 흘렀다. 이대로 두면 눈이 가렵고 충혈될 것이다. 그다음은 피부의 발진. 난감해하는 내게 S는 알레르기 약을 건넸다. 손님을 위한 응급약으로 알레르기 약까지 미리 준비해 두는 준비성이라니. 다행히 알레르기 증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우리 언니 다이소도 구경할래?
과연 다이소와 맞먹는 다 있소가 집 안에 있다. 필요한 무언가를 말하면 바로 꺼내 줄 것 같은, 도라에몽 주머니의 방 버전이라고나 할까.
언니는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냉동실 사진을 보여주며 1번부터 5번까지의 메뉴 중 선택하라고 했다. 양념이 다른 고기 요리와 튀김 중에서 튀김을 골랐고, 언니는 뚝딱 밥을 차려서 마당에서 따온 상추와 함께 주었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식탁 위에는 치즈냥이 한 마리가 앉아 같이 상추를 뜯어먹었다.
전철역까지는 S의 언니가 배웅해 주었다. 전철역으로 가는 도중 어두운 길을 달리던 차는 갑자기 멈췄다. 운전을 하던 언니가 길을 가로지르는 개구리를 발견한 것이다. S와 S의 언니는 개구리가 안전하게 반대편 풀숲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 차를 다시 몰았다. 형제끼리는 닮는구나. 외모뿐 아니라 성품도. 자기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애정과 선량함은 내가 겪은 S의 성품인데, 처음 만나본 S의 언니도 다르지 않았다. 곤란에 처한 어떤 존재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타적인 마음. 의심 없이 상대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마음. 동생이 좋아하는 친구이니 덩달아 좋아해 주는 마음.
나는 50대에 새로 사귄 친구 S와 S의 언니 집에 다녀오는 길이다. 셋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S의 동생은 내게 기꺼이 자신의 침대를 빌려주었고, 불꽃놀이를 보러 오라는 약속을 했고, S의 언니는 나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갑자기 금촌에 와 있는 내가 낯설었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이런 어리둥절함도 느꼈다.
그녀들은 다만 자매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환대했다. 그런 순전한 환대를 받아본 경험이 흔한 일은 아니다.
운전을 하는 S의 언니와 보조석에 앉은 S는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루 종일 내린 비는 점점 잦아들었다.
또 놀러 오라고.
다음에는 꼭 자고 가라고.
그때는 아들과 함께 오라고.
S의 언니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