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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알바 히스토리

남의 편 돈은 더럽고 치사하다

by 함지연 Feb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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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30년 차인 나는 혼인기간 내내 '무직'상태였다. (무직이라고 굳이 표현한 건은,

전 배우자가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내 약점으로

공격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과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녀 양육에 헌신했고,  장애가 있는 막내는 특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으며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과 대리효도 역할을 혼자 수행하느라 바빴다는 건 다 제쳐두고, 막무가내로 바깥에서 벌어오는 수입이

없다는 이유로 나의 '직업 없음'은 전 배우자가 쥔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내 약점을 정확히 알았고, 당연히 나는 아직 못다 한 공격들은 접고 전투에서 기권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 때, 또는 학원에 보낼 때 다툼이 생겼고, 바깥 일을 하는 본인이 승인하지 않은 지출을 안 일을 하는 내가 혼자 결정했을 때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수동적인 인간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그가 정한 규칙을 어겼고 그건 싸움으로 이어졌다.


거듭되는 공격에 항상 무방비하게 패배했다. 동일한 무기로 동일한 곳을 집중 공격당할 때 당연하게도 그 고통이 더욱 컸다. 그 이면에는 나의 직업 없음을, 그로 인한 경제적인 무능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일해서 번 돈이 간절했다. 내가 번 돈을 손에 쥐어보고 싶고, 그 돈을 쓰고 싶었다. 어디서 사람 구한다는 광고만 봐도 내게 가능성이 있나없나를 계산하고는 했다. 그때의 내가 생각한 복수는 고작 알바몬과 지역신문의 구인글을 뒤지는 일이었다.


남의 편 돈은 그야말로 더럽고 치사했다.


마침내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시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기 전의 오전 시간에 할 만한 일을 알아보았고, 다음에는 주말에 할 만한 일을 구했다.


가장 오랜 기간 했던 알바는 백화점 판매일이다.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창이 급하게 필요한 인원 보충을 위해 연락이 오면서 시작한 일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선 채로 근무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몇 시간 동안 집을 벗어나 바깥일을 하는 것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한 개 사러 왔던 고객에게 두 개를 판매했을 때도 즐거웠다.

처음으로 스포츠 브랜드의 세일행사에서  2일 일하고 받은 돈은 16만 원. 나의 노동이 드디어 돈으로 환산되고 내가 10시간 동안 한 노동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첫 알바비로 자녀에게 겨울용 패딩을 사 주고,

치킨을 배달시켜 자녀들과 먹었다. 내돈내산이

이렇게 뿌듯한 일이었구나 싶었다.


물론 지금은 전업주부가 한 일도 얼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계산되기는 하지만, 30년 동안 쌓인 내 노동에 대한 돈은 실체가 없다.

수천 번 반복했던 밥 짓기와 설거지와 분리수거와

기계세탁과 손세탁과 빨래 널기와 빨래 개기와 음식물쓰레기 버리기는 내게도 경제적인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주지 못했다.

아픈 아이를 업거나 걸려서 병원에 데려갔던 일도,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밤새 간병한 것도, 더 이상 덮을 것이 없어 수건을 덮고 자며 토사물이 묻은 이불들을 주물러 빨았던 것도 아이를 앉혀놓고 수천 권의 책을 읽어준 것도 바깥일을 하는 남의편에게는 '집에서 노는'행위에 불과했다. 나의 안 일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내가 결코 무가치하고 무능한 인간이 아님을

발악하듯 증명하고 싶었다. '무직'이라며 나를 깎아내리는 그에게 보란 듯 경제적인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니 미련스럽기까지 하다.


평생 무직(전적으로 남의편 표현이다)이었던 나는 최선을 다해 바깥일을 했다. 무식하게 일했다. 고객이 없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매대의 먼지라도 닦았다. 비뚤어진 구두라도 반듯하게 놓았다. 성실하고 성실하고 성실했다. 약속한 날짜에 통장에 입금된 금액을 보면 뿌듯했다.


남의 편 돈은 치사했는데, 내 돈을 쓰니 치사하지 않았다.


일을 어찌나 잘했는지 처음에 일했던 매장의 옆 매장에서 앞 매장, 옆옆 매장에서 급할 때마다 일해달라며 불렀다. 몇 십만 원, 그다음엔 몇 백만 원의 소득이 생기며 지하 100층 아래 처박혀있던 자존감도 계단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번 돈의 맛을 그제야

체감했다.


갑작스러운 펜더믹 사태로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았고 백화점 매출도 가파르게

떨어졌다. 모든 세일행사는 중단되었고 정직원조차 인원감축, 또는 해고되면서 시간제 직원은 더 이상 채용하지 않았다. 익숙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여성구두가 89.000원, 99.000원을 함께 외치던 남자 직원이 있다. 히어로물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영화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그 나잇대의 아들은 있겠지 싶은 그와 친했다. 일을 그만둔 뒤,  다른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웠던 일이 있다. 이모라고 부르며 친숙하게 지냈던 다른 직원들의 안부를 잠깐 나누고 헤어졌고 그 후에  근무한다던 매장 앞을 지나며 물으니 새로 온 직원이 그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소설을 쓸 거라고 하니, 그러면 소설 속에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했었는데, 30대인데 이미 외롭고 시린 시간을 살아온 그의 이름은 이왕이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가족도 있고 통장에 돈도 많고 행복한 남자 캐릭터를 등장시킬 때 사용하려고 아껴두고 있다.


복지관에서 강사일도 해봤고, 도서관에서 보조 사서일도 했다. 백화점에서 신발을 팔 때도

신났고, 복지관에서 할머니들과 수업을 할 때도 도서관 서가에서 무거운 책을 들어 나를 때도 즐겁기만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알바는 웨딩꽃장식 보조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해서 5시간 동안 일한다. 예쁜 꽃을 보고 만지고 향기를 맡으며 하는 일이라 만족도가 높다. 물론 가시도 찔리고 허리도 아프다. 그래도 활기 찬 30대 플로리스트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일하니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다.

예쁘고 착하고 젊은 대표님이 가끔 남는 꽃을 챙겨줄 때도 있고, 웨딩홀 직원식당에서 맛있는 밥도 먹는다. (난 왜 이렇게 직원식당 밥을 좋아하나. 백화점에서 일할 때도 직원식당 밥을 너무 잘 먹어서 지금도 아쉽다)


내 노동력이 돈이 되는 이 신나는 경험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여동생이 은퇴 후, 트럭을 사서 캠핑을 다니며 캠핑장 앞에서 순대나 어묵을 팔자고 했는데 찬성. 내 친구 1은 쿠팡 알바를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는데 혼자는 민망하니 같이 가보겠느냐 했는데 그것도 찬성.


전 배우자는 남의 편 돈은 더럽고 치사하다는 사실을 부단히 내게 깨우쳐주었고 나는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 쓰는 바깥일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해야 하나. 굳이 만날 일까지는 없고 전 남의 편, 암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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