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기분 좋게, 힘찬 마음으로 출발했다가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무거워지면 속도를 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무동력 상태처럼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을 뛰다 보면 어느새 결승지점에 도달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완주 지점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해 준 크루원들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공유한다.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요동치는 감정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수 만 명이 운집하는 마라톤 대회에서 출발지점부터 한 동안은 병목현상을 겪는다. 인파에 휩쓸리다시피 많은 사람들과 걸음을 같이 하다가 일정 구간이 지나서야 본인의 속도대로 뛸 수 있게 된다. 주로(走路)에 여유공간이 생길 때쯤, 내 옆에는 비슷한 속도의 러너들 몇 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를 앞지르기도, 뒤처지기도,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그저 앞 주자의 등을 보며 묵묵히 달릴 뿐이다.
처음에는 부스터를 달고 힘차게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무거운 모래자루를 들고뛰는 거마냥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사이 많은 주자들이 나를 추월해 지나갔고, 조금 전까지 비슷한 속도로 달리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너무 힘든데.. 아직 반도 안 왔는데..”
고비가 찾아올 때쯤 저만치서 응원소리가 들려온다. 대로변부터 횡단보도, 대교 위, 완주 지점 근처, 곳곳에 응원단들이 포집해 있다.
“파이팅!!! 가즈아!!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손바닥 모양의 판넬로 주자들에게 하이파이브를 해주기도 하고, 신나는 노래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며 목청껏 소리 지르며 응원해 주는 응원단들이 보인다. 울컥하는 마음과 동시에 하이파이브를 하며 없던 힘도 쥐어짜본다. 갑자기 발걸음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페이스가 순식간에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응원단 덕분에 이 끝이 안 보이는 주로에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위로받으며 연대감을 느낀다. 모두 다 힘들지만 같은 목적으로 함께 뛰고 있다는 이 소속감이 나를 끌어올려준다.
땀이 비 오듯이 나고 타들어가듯 목이 마를 때쯤, 시야에는 급수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원봉사단 분들이 종이컵에 물을 부랴부랴 따르며 주자들에게 건네주고 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잠깐 숨을 돌리고 싶지만, 여기서 지체되면 안 되기에 순식간에 원샷하고 감사의 목례와 함께 바로 주로를 향해 뛰어간다.
대회가 아니더라도 같이 뛰는 멤버들을 위해 보급을 선택하기도 한다. 멤버들에 비해 페이스가 한참 느려 뒤처질 때면 애매하게 뒤따라갈 바에 사진과 보급을 맡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이기도 하다. 근처 편의점으로 급히 가서 음료수를 사 와 맞은편에서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음료수와 함께 역동적인 사진을 찍어준다.
약속지점에서는 오직 응원을 위해 먼 걸음 해준 우리 크루원들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주자들 사이에서 우리 멤버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전력질주를 하고 있으면 더더욱 놓치기 쉽기에 배번호를 입력해 실시간으로 위치 파악이 가능한 어플을 보면서 응원지점에서 대기한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탈진할 것만 같은 어지러움에 그대로 쓰러지다시피 눕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나를 위해 응원하러 온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본다. 이날을 위해 그간 연습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주는 크루원들이 보인다. 휘황찬란한 러닝복을 입고 있는 많은 주자들 사이에서도 우리 크루이름이 새겨진 티는 귀신같이 알아본다. 한 손에는 간식과 한 손에는 카메라를, 만반의 준비를 한채 주로 쪽으로 몸을 한껏 기울인다. 마주치는 순간은 정말 1초 남짓한 찰나의 순간이다. 그 몇 초 사이에 간식제공, 응원, 사진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생명수와 같은 꿀물과 레몬을 입에 물고 응원단의 힘에 입어 다시 힘차게 주로로 나가 뛴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희생정신 하나로 새벽부터 일어나 응원하러 가는 것은 분명히 많은 품을 들이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주자와 비주자가 비록 같이 달리지는 않지만, 느슨한 연대를 통해 하나 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