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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Oct 14. 2023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가을아침산책의 힘

조용한 날들을 지켜나갈,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힘


37.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여러 번 강의했고 여러 번 읽었던 텍스트. 그런데도 우연히 펼쳤을 때 문장들이 눈을 뜨면서 빛났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처럼. 그래도 첫 문장의 빛은 역시 해맑은 아침 햇빛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은 자기가 스스로 사겠다고 말했다."


35.

한바탕 쓸고 간 빗줄기에 흩어진 낙엽을

휴대폰 안에 담는다.

사진은 마술이다.

찍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건이 된다.


50.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101.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결정주의라는 선취된 오류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오류의 자리에 희망을 앉혀야 한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발생한다. 이 희망의 진실에 대한 확신이 지금 내게 절실한 미덕이다.

그러니 희망을 노래하자.

비타 노바.


134.

조용한 날들을 지키기.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81.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129.

아침 산책.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새들이 빠르게 하강하더니 더 멀리 날아간다.

가을 하늘이 왜 그렇게 맑고 깊고 텅 비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봐, 나는 텅 비어 있어.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어.

사방이 열려 있어.

모든 곳이 길들이야.

그러니 날아 올라. 날개 아래 가득한 바람을 타고......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10월의 필사책 <아침의 피아노>에는 아침 풍경과 산책, 고요한 일상 이야기가 종종 나와서 나도 글을 읽다가 한번씩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약 이년간은 매일 아침 산책을 했는데, 걷다 보면 갑자기 머릿속의 생각들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재밌는 생각을 가득 안고 흥분된 상태로 돌아올 때가 좋았다. 그 덕분에 일기도 더 자주 쓰기 시작 했던 것 같다. 얼마전엔 산책 하다 가끔 만났던 친구(첫째 아이가 유치원 다닐때부터 아이도 엄마도 친구인 십년 넘은 인연. 한동네에서 아이들이 같이 크는 모습, 그 아이들이 멀리 이사간 친구가 찾아오면 여전히 모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시간을 견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서로의 사친첩에는 서로의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다 간직되어 있다.)가 요즘은 왜 아침에 안 보이냐고 연락이 왔다.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재미가 있었는데. 사실 최근 일년간은 내가 필라테스를 거의 매일 가게 되면서 산책을 거의 못했다. 운동 이상의 걷는것 만의 여러가지 매력이 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예전에 아침 일곱시 무렵에 산책할 때,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그 친구와 마주치면 우리는 다시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며 주로 책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는 나에게 도서관에서 빌린 오르한 파묵이나 주제 사라마구 등 유명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작가들의 책 이야기를 하고, 나는 프루스트가 얼마나 내 인생을 바꾸었는지에 대해 지겹도록(?) 이야기를 한다. 지금 생각하니 갱년기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길에서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와 문학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건지. 더불어 나와 필사를 하는 친구들, 4년째 북클럽 하는 친구와도. 한참 아침 산책에 몰두할 땐 한겨울에도, 심지어 눈이 쌓였을 때도 잔뜩 무장을 하고라도 매일 걸어야 했는데,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을 좀 만끽하며 아침 산책을 한번씩 해야겠다. 또 예상치 못한 것들-생각, 만남, 풍경, 기분 등-을 안고 돌아올 수 있으니까. 불확실하고 아득한 하루에 일상을 지킬 일이 하나라도 약속되어 있다는 것은 불안을 잠재우게 한다. 눈을 크게 뜨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지 않으면 매일 빠르게 달라지는 가장 아름다운 지금, 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채 그냥 보내버릴 것만 같다. 맑고 텅 빈 가을 하늘 아래를 걸으며, 곧 다가올 겨울의 조용한 날들을 지켜나갈,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힘을 채워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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