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으로 보는 세상

by 이주형

은행으로 검은 안경을 끼고 흰 지팡이를 짚은 시각장애인이 들어섰다.

통장 개설을 위해 청원경찰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던지 뒷자리까지 들렸다. 언젠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귀에 익은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물어보는 직원의 질문에 익숙한 이름이 들린다. 그 친구가 맞다는 확신이 들어 객장으로 나가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비록 검은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바로 그 친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지 않았지만, 내가 눈을 다쳤을 때 같이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던 전우였다. 20여 년 만에 기적처럼 만났다. 그 친구는 야맹증으로 후송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고, 그가 먼저 제대했다. 고향도, 나이도, 계급도 같았다. 또한 눈에 대한 부상으로 같은 병원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각별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그가 먼저 갑작스럽게 제대하면서 연락처도, 주소도 제대로 묻지 못하고 헤어졌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세월의 흐름에 묻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였다. 통장 개설을 마치고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그 친구는 제대했지만, 눈은 점점 더 나빠졌고, 2년 후에는 양쪽 눈이 완전히 실명되었다고 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라 좌절하지 않았다고 했다. 곧바로 안마 일을 배워 지금은 안마사로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즐겁다고, 걱정 없다고 말하며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지만, 내 눈에는 그의 표정에서 감춰진 그늘이 보인다. 차마 내게 조차도 말하지 않는 시련과 아픔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가끔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찾을 엄두가 나지 않더란다.


근무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쌓여있던 회포를 풀었다.

식사 내내 나의 작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밝은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가슴이 아리면서도 고맙다. 본래부터 밝고 긍정적인 성격임은 알고 있었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는 그의 배려가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어떤 위로의 말도, 어떤 격려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없이 꼭 안아주며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흰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걷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의 몸 중에서 중요하고 귀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중요하고 귀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처음 대할 때도 눈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기관이다. 또한 사물을 보는 기능뿐만 아니라, 의사전달 수단이기도 하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가 거짓말을 하면서도 '똑바로 보고 말하라'라고 했는가 보다. 날카로운 눈빛에도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눈을 마음의 거울이라고도 하고, 영혼의 창이라고도 했는지 모른다. 눈은 고도로 발달된 최고의 감각기관이다.

그런 중요한 눈이 나에게는 한쪽밖에 없다.


한쪽 눈밖에 없으니 내 눈은 사백오십 냥쯤은 되려나?

처음 눈을 잃었을 때는 괴롭고 좌절도 했었다. 한쪽 눈의 의안이 표시 나는 게 두려워 상대방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로 인해 오해받은 적도 있었고,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다녀 건방지다는 소릴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꿋꿋하게 잘 살아가고, 멋지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던 중 최근 개그맨이자 가수인 이동우 씨의 감동적인 사연에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 질병으로 1급 시각장애 진단을 받았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었을 어느 날, 이 씨의 사연을 들은 40대 남성으로부터 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단다. 설레는 마음에 그 남성을 직접 찾아갔다. 그 남성은 근육병 환자였단다. 몸의 전체가 마비되어 있어 성한 곳이라고는 두 눈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동우 씨는 기증받는 것을 포기했단다.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기증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를 잃고 아홉을 가진 사람인데, 그분은 오직 하나 남은 눈마저도 저에게 주시려 했다고.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인데 그분은 달랐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딸이 얼마나 예쁘게 컸는지 단 5분 만이라도 얼굴을 보는 것'이라 말하며 마무리했다. 이동우 씨는 중도 시각장애를 겪고 있으니 얼마나 이 세상을 다시 보고 싶을까! 나는 이 사연을 접했을 때 "당신의 잃은 한쪽 눈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눈을 당신에게 주고 싶다."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 후각까지 잃은 채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생애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를 잃었다고 모든 걸 잃어버린 것처럼 괴로워했다. 꿈도, 희망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었다. 그건 아마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럴듯한 모양을 닮은 핑곗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손톱 밑 가시가 다른 사람이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아프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실의 고통을 자신과 분리하지 못하고 평생 상실감에 사로잡혀 몸부림쳤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한 눈으로 보는 세상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두 눈으로 보는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볼 수 있는 한쪽 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오늘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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