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by 이주형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옷자락에는 온통 겨울 냄새가 묻어있다. 차가운 냉기는 아내의 뒤꽁무니를 따라 거실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혼잣말처럼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지'한다. 그러더니 오늘 저녁은 반찬도 별로 없는데 추억의 도시락이나 해 먹잔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좋지~"했다.


주부들은 '오늘은 뭘 해 먹어야 하나?' 하는 걱정을 매일 하고 산단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주는 음식이란다. 그 걱정거리를 줄여주려면 주면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먹어주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주방에서는 벌써 참기름과 김치가 어우러지면서 도시락이 익어가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고, 코가 벌름거린다.

그 냄새에 갑자기 초등학교 때 도시락 때문에 벌어졌던 사건이 생각난다.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국의 무상원조로 지원되는 가루우유를 끓인 죽과 옥수수 빵을 지급했다. 우리 집은 그 정도로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다. 오전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엔 아침에 먹었던 밀기울(밀을 찧어 밀가루를 분리하고 남은 껍데기)에 보리쌀이 섞인 밥이었다. 이를 본 내 짝이 개밥 같다며 놀렸다. 급기야는 친구들이 몰려와 내 도시락을 덮어 책상 속으로 집어넣고 놀려댄 짝의 얼굴에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주먹을 멋지게 한 방 날렸다. 멋진 내 주먹 한 방은 짝꿍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적중했다. 짝꿍은 뒤로 고꾸라지면서 도시락과 함께 바닥에 나 뒹굴었다. 겉에만 보리밥으로 위장해 놓은 하얀 쌀밥과 더덕장아찌가 교실 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한입 베어 먹은 계란프라이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채, 교실 마룻바닥으로 처참하게 떨어졌다. 짝꿍의 코에서는 피가 흐른다. 하지만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교실 바닥에 쏟아진 하얀 쌀밥과, 한입 베어 물어 반달만큼 남은, 노른자가 선명한 계란프라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상황에서도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널부러진 더덕장아찌 냄새는 콧속으로 스며들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안에는 침이 고인다.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내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 원망스럽다. 들려오는 친구의 울음소리와,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반 친구들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와 버렸다.


학교 후문으로 뛰쳐나가 유유히 흐르는 섬강변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애꿎은 돌멩이만 강물 속으로 던지며 분풀일 했다. 분풀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돌멩이처럼 뭉쳐있는 응어리를 꺼내어 던져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많은 날들. 억울할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언제나 힘없는 나는 애꿎은 돌멩이와 강물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저 가슴속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속울음을 울었다. 바람은 내 귓전에 앉아 쉬고 있고, 강물은 상처를 보듬어 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울며 흘러간다. 강바람의 입김을 느끼면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교실에 들어갔을 땐 담임 선생님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나를 찾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겁나거나 무섭지 않았다. 당당하게 교무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는 어느 사이에 '나쁜 새끼'가 되어 교무실 뒤 공간으로 끌려갔다. 선생님의 손아귀에 틀어 잡힌 귀가 찢어질 듯 아프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가느다란 종아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기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들이 '그놈 참 독하네~'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순간에 나는 '나쁜 놈'이 되었고 '독한 놈'이 되어 있었다. 그 대가로 일주일 동안 화장실 청소라는 벌이 내려졌다. 친구를 왜 때렸는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다. 아니 자세한 내막이야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여러 선생님 중에 누구 한 사람도 폭력의 원인을 묻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을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할 뿐, 자존심까지 부족하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존심까지 짓밟을 권리까지 그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화장실 청소를 마친 후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종아리의 통증 때문에 자갈길을 걷듯이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노라니 배도 고프고 종아리도 아프다. 길섶에 있는 찔레 순과 수영(싱아) 줄기를 꺾어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종아리에 남아있는 붉고 푸른 회초리의 발자국도, 마음속에 난 상처도 강물처럼 금방 아물면 좋으련만.


한참을 걷다가 강가에 앉아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을 열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한술 떠서 강물에 던졌다.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피라미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작은 입을 뻐끔거리며 서로 먹겠다고 밀치고, 물어뜯고 난리들이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그렇게 피라미들에게 도시락을 다 내주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피라미들에게라도 먹였으니 됐다고 나를 달랬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


맛있는 추억의 김치 도시락밥을 먹으면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주책맞게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그러나 워낙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땀을 많이 흘리는 탓에, 아마 아내는 내 눈물을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계란프라이가 올려진 추억의 도시락으로 호사를 누린 오늘 하루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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