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책값

by 이주형

얼마 전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서 가끔 들르던 서점에 갔더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쇠사슬에 두 손잡이가 꽁꽁 묶인 채 출입문에는 사정상 폐업했다는 안내문만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필요한 책이 있었기에 또 다른 서점을 가 보았으나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서점에 들어서면 책갈피 속에서 흘러나오는 파릇한 잉크 냄새가 좋다. 신간 서적들을 둘러보거나, 요즘 많이 읽히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살피는 맛 또한 퇴직 후 누릴 수 있었던 여유와 호사였다. 창가에 앉아서 얇은 시집이나 신간 서적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 또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즐거움과 여유, 소박한 호사를 빼앗겨 버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도 책방이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 서점의 할인과 무료배송에 밀려 부득이 폐점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동안 이용해 주셔서 고마웠다'는 문자가 날아들었다. 이젠 그 여파로 나름 대형서점이라는 곳들까지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동네 책방에 들러 주인과 세상 사는 이야기며, 지난번 구입한 책 이야기, 요즘 잘 나간다는 베스트셀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렇다 보니 요즘은 나도 인터넷으로 필요한 책을 산다. 인터넷으로 사면 편리하기도 하거니와 저렴하기까지 하다. 편리함과 저렴함이라는 유혹에 내 즐거움을 맞바꾸기에는 조금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고등학생 시절, 가끔 시내에 나가면 원주 가톨릭센터 옆 A도로변에 있는 헌책방을 습관처럼 들르곤 했었다. 공부를 잘하려고 참고서를 사기 위해 책방을 들른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도 전과나 수련장은 물론 중·고등학교 때도 참고서라는 이름이 붙은 녀석들의 자리는 내 책꽂이엔 없었다. 그곳엔 몇 군데의 헌책방이 있었다. 사고 싶은 책과 사야 할 책들이 있었지만, 주머니는 언제나 허기져있었다. 그래도 헌책방에 들어가면 주인아저씨보다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곰팡이냄새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헌책방의 냄새가 좋았고, 소설책을 읽으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이 좋았다. 주인아저씨의 눈치를 봐가며 보고 싶은 책을 뽑아 구석에 기대어 읽곤 했다. 다행히도 주인아저씨는 눈치를 주거나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내 노력으로 번 돈으로 육성회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교재를 사기 위해 그 헌책방에 들렸다. 보충수업 교재로 꼭 필요했던 '수학의 정석'. 보충수업 때마다 옆 친구의 책을 같이 봐야 해서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진열대에 쌓여있는 '수학의 정석'을 당당하게 집어 들고, 가끔 들를 때마다 조금씩 읽던 소설 '테스'를 책꽂이에서 뽑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육천 원이라고 한다. 수중에 남은 돈은 사천오백 원뿐이다. 슬며시 '테스'를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주인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며 돈이 모자라느냐고 묻는다. 나는 창피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수학의 정석'값만 받을 테니 '테스'는 나중에 돈 벌면 갚으란다. 그동안 이곳에 드나드는 걸 보고 성실하고 착해 보여서 그러는 것이니 부담으로 느끼지 말란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물론 '테스'도 시간이 흘러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인사이동으로 원주에 근무하게 되었다. 긴 세월을 떠나 있었던 고향에서 근무하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느새 이십여 년이 지나 있었다. 그리 좋은 추억은 없지만, 모교를 찾아가 변해버린 교정도 둘러보고, 매를 맞고 화살 맞은 사슴처럼 모로 누웠던 숲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끔 쏘다니던 시내 골목들도 걸어 보았다. 짜장면 냄새를 몰래 훔쳐 먹었던 길, 가끔 들르던 헌책방이 몰려 있던 길을 걸어보았다. 그제야 묵은 책값 생각이 났다. 그 책방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책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고 했다. 주변에 있었던 책방도 마찬가지다. 헌책방 주인아저씨가 나중에 돈 벌면 갚으라며 건네주던 소설책 '테스'!

아! 묵은 책값은 어찌해야 하나! 지금은 돈을 벌고 있기에 그 책값쯤은 부담 없이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내 기억의 오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애써 지난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는 몇십 년 전 도둑 열차를 타고 상경했던 일 때문에 도덕적인 상처를 견딜 수 없었다며 그때 운임의 몇백 배에 달하는 금액을 갚았다는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하도 많이 읽어서 지금까지도 테스(테레사 더비필드)의 줄거리와 주인공들의 이름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고, 작가가 영국의 작가인 '토머스 하디'라는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면서 묵은 책값을 잊고 있었다니, 무심한 나를 책망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헌책방에서 오래된 활자를 갈피 갈피에 품어 안고 내뿜던 곰팡이냄새도, 책방 아저씨의 넉넉한 인심도 느낄 수가 없다.

서점 창가에 앉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각거리던 책장의 숨소리를 들으며 즐기던 여유도 사라져 버렸다.

이젠 표정 없는 컴퓨터 화면에 대고 책을 보내 달라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배달된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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