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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주 Feb 18. 2022

강아지를 키우며 철이 든다

해리와 나 5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해리가 반갑게 맞는다.

분명 집을 나선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아온 것인데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것처럼 격렬히 반긴다. 환영에 화답하여 머리를 쓰다듬으면 해리는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산책 가자” 하는 모양으로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물고 들어온다. 이 녀석, 나를 기다린 건지 산책을 기다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엉덩이를 붙일 겨를도 없이 겉옷을 갈아입고 배변봉투를 챙긴다. 그 짧은 사이를 못 참고 해리는 혼자 거실과 현관을 부지런히 오가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법 흥분한 모양이다.

이럴 때 서둘러 따라 나갔다가는 산책길이 내내 고되다. 우선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거실과 현관 사이 중문을 닫고 “앉아!” 명령을 한다. 제법 진지한 톤으로 말을 했는데 흥분한 강아지에게는 소 귀에 경읽기이다. 이럴 때 “앉아!” “앉으라고!” 소리를 쳐 봤자 내 목만 아프고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한두 번만 말하고 가만히 있는다. 강아지가 행동을 멈추고 산책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다행히 해리가 눈치를 챘는지 중문 앞에 와서 앉는다. "잘했어!" 칭찬을 하고 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중문을 지나 현관으로 나간 강아지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다. 현관에 있는 물건을 입에 물고 거실과 현관을 왔다 갔다 하며 산책 가기 전 신나는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다시 “앉아!” 명령한다. 이번에는 해리가 다가와서 앉는 시간이 조금 짧아졌다. 다시 문이 열리고 문밖의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강아지가 튀어 나가기 전에 먼저 “기다려!” 한다. 엉덩이를 바닥에서 뗐다 하면 열렸던 문은 다시 닫힌다. 그걸 아는 강아지는 자꾸만 앞으로 쏠리는 몸을 부여잡고 내 손만 쳐다보고 있다. “가자!” 하면 “오예!” 하고 밖으로 나간다.


이런 과정을 지나 산책을 나왔는데도 강아지의 흥분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떼를 쓰거나 보채지 않아도 정해진 때가 되면 산책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꼬박꼬박 산책을 나가고 있고 계속 교육도 시키고 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산책 초반 치고 나가려 하는 것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감지하면 쫓아가려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강아지의 본능이고 무시하고 어떻게든 끌고 끌리며 산책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행동은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숙제다. 해리가 줄을 끌거나 순간적으로 당기면 우리 둘 다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에 치일 수도 있고 길에서 미끄러지거나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거나 느긋하게 동네를 배회하던 고양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봉변이 되기도 한다.

대체로 내가 멈춰 서면 해리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가까이” 내가 말하면 해리는 나에게 다가온다. 팽팽해진 산책 줄이 느슨해지면 다시 걷는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당기거나 앞뒤 안재고 무조건 끌어당길 때는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이 녀석 끄는 힘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형견 산책은 유산소 운동(걷기)과 근력 운동(당기기)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종합 스포츠다.

줄을 짧게 잡고 신경전을 벌이다 보면 어깨는 결리고 표정은 굳어진다. 이런 긴장이 반복되고 또 길어지면 점점 몸과 마음이 지친다. 머릿속도 복잡하다. 내가 왜 큰 강아지를 키워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버겁다 느껴질 때도 있다. 반복적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는 데도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은 고쳐지지 않는 걸까 원망스럽기도 하다. 정말이지 교육이고 훈련이고 다 필요 없고 해리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다가 때가 되면 집으로 들어가서 눕고 싶을 때도 있다. 줄을 놓아 버리고 강아지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강아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것이며 보호자인 나는 산책 줄도 정신줄도 놓아서는 안 된다.


강아지를 키우는 데는 책임감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고 강아지의 보호자인 나는 강아지도 그 규칙을 인지하고 따를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나 주변의 비인간 동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한 훈련, 해리에게 필요 없는 훈련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해리가 통제되지 않는 행동으로 우리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누군가를 위협하지 않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가르치고 통제하고 싶다. 내가 보호지이니까, 인간이니까 나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밖으로 나갔을 때 위험을 조금 더 잘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해리가 받아들이고 이에 따르도록 하고 싶다. 해리에게 낯선 존재에게 함부로 다가가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고 싶다.


문제는 자연 상태의 강아지를 교육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지 책이나 영상을 찾아보고 따라 해 봐도 문제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이 사람처럼 전문가가 아니라서, 아니면 우리 개는 똑똑하지 않아서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하고 싶어 진다. 강아지에게도 사회화 시기가 있다는데 해리는 그 시기를 놓쳐서 늦어버린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때 필요한 것은 보호자의 전문성이나 강아지의 천재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내심이다. 

변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찾아온다. 되풀이되는 교육이 지난하게 느껴지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변화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돌아보면 해리도 변한 것이 많다. 산책 초반 흥분하는 것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고 “이리 와”나 “천천히”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고 쫓아가려는 빈도도 조금은 줄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그동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안이 된다.


이제껏 나는 ‘책임감’이나 ‘인내심’이라는 말들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런 말들은 내가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무엇을 인내하는 삶보다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삶을 꿈꿔왔다. 그리고 어쩌면 한편으로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며 살아야 철이 든다는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과년하도록 혼자 살면서 고작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며 책임이니 인내니 하는 말들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자격 없는 사람의 가소로운 발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강아지와 함께 살고 강아지를 길들이며 책임과 존중이, 또 인내와 자유가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존재를 돌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일인지도 느끼고 있다. 그 존재가 꼭 배우자나 자식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철이 든다는 말이 이처럼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어쩌면 적당한 상대를 만나 책임감과 인내심을 배우며 철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반려견 해리와 함께 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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