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21
강아지는 이 세상에서 인간보다 짧은 시간을 살다 간다. 대형견의 평균 수명은 12~14세라고 알려져 있는데 수의학과 영양학의 발달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백 년을 바라보는 인간의 수명에 비하자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시간을 강이라고 생각한다면 강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강아지도 인간도 태어나서 나이를 먹고 병들고 죽는다. 그렇지만 강아지의 강과 인간의 강이 같은 속도로 흐르지는 않는다. 강아지의 강은 인간의 강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흘러가는 해리의 강을 늦추거나 되돌릴 수 없으니, 또한 내 것으로 대신 흐리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해리는 나보다 빨리 바다를 만나게 될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해리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해리도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할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강아지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모습인 듯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인간과 강아지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에 따르면 인간에게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가 지나면 다음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강아지의 시간은 궤도를 따라 반복적으로 원을 그리는 시곗바늘과 같다. 강아지에게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이 매우 적확하다고 느낀다. 만약 흘러가 버리는 것이 시간이라고, 과거의 어떤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매끼 먹는 사료에 그렇게 행복한 몸짓을 하고 매일 하는 산책에 그렇게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사람에게 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무엇이다. 우리는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특별함을 꿈꾼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며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에 집중하지 못한다. 우리의 순간에는 수많은 과거와 미래에 얽혀 있다. 그렇지만 강아지에게는 다시 오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은 없는 듯하다. 물론 강아지도 과거의 기억과 예측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예측가능한 삶이 주어진다면 그러한 불안은 해소될 것이다. 강아지들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큰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예측 가능한 질서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렇게 다른 시간 속에, 다른 모양의 행복을 그리는 우리이지만 함께 하는 순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많은 같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든 반복되는 것이든 우리가 함께 하는 날 동안에는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날씨가 좋고 온도가 적당한 날에는 해리와 함께 출근을 한다. 해리와 같이 이동을 하기 위해 내 작은 경차 뒷좌석은 해리 짐으로 가득 차 있다. 뒷좌석 시트를 접어 해리가 엎드릴 수 있을 만한 이동장을 실었고, 해리와 산책을 할 때 필요한 물품도 채워놓았다. 덕분에 내 차는 앞 자석에만 사람이 탈 수 있는 2인 1견승이 되었다.
트렁크 문을 열고 해리에게 “타!” 하면 해리는 폴짝 뛰어 이동장 속으로 들어간다. 차를 달릴 때 해리는 가만히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가끔 헤드라이트를 켜고 따라오는 차가 보이거나 지나쳐 가는 오토바이를 만났을 때 맹렬하게 짖어 대기도 하지만 이동장 속을 제법 편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덕분에 우리는 안전하게 함께 출근도 하고 멀리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차를 대고 주차장 옆 작은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해리는 지난번에 왔다간 사이에 어떤 녀석들이 정원을 다녀갔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런 뒤 옥상으로 올라간다. 회사 옥상에는 소형견 두 마리가 살고 있다. 오래도록 회사 주차장을 지키던 하얀 강아지 산이와 얼마 전 새로 들어온 갈색 푸들 토리이다. 산이는 사람을 좋아해서 옥상에 누군가 올라오면 해맑은 얼굴로 뛰어나오지만 나이가 많고 성격이 소심해서 덩치 큰 새 친구 해리는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토리는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도 넘치는 청년 강아지라 해리와 뛰어다니면서 장난을 치며 노는데 가끔은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강아지들과 인사를 하고 물과 밥을 챙겨준 다음 해리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와 일을 한다. 그렇게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면 얼른 식사를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 문을 열면 강아지들이 우르르 쫓아 나와 나를 반긴다. 물론 해리가 가장 먼저다. 해리를 쓰다듬고 옥상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쐰다. 특별한 사건 없는 이 짧은 시간에 행복함을 느끼는 나를 보면 나는 이미 강아지의 시간에 물든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점심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충전한 나는 오후의 일을 마저 마치고 퇴근시간이 되어 해리를 데리러 옥상으로 다시 올라간다. 옥상 문을 열면 해리는 점심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반가움에 더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아니 산책 갈 시간이라는 걸 안다는 듯 잔뜩 흥분한 모양이다. 강아지들이 시계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퇴근 시간을 알고 다르게 반응하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강아지들은 분명 시간을 안다. 밥 먹을 시간도 알고 산책할 시간도 안다. 이것은 배고픔이나 배변욕구 같은 신체의 리듬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강아지는 반려인이 퇴근하고 출근하는 시간도 알고 이에 특별하게 반응을 한다. 강아지가 시계를 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신기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다. 강아지는 인간보다 다양한 감각으로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고, 인간보다 더 민감하게 신체 리듬을 느끼기 때문에 다양한 단서를 이용해서 시간을 추적할 수 있다는 가설도 있고, 특정한 냄새의 존재나 그 강도에 따라 시간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다는 가설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알렉산드라 호로위츠에 의하면 강아지는 냄새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해리를 옥상에 데려다 놓고 옥상 문을 닫고 나가면 내가 남긴 냄새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해리는 이렇게 냄새가 사라지는 것을 통해 시간이 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냄새가 얼마만큼 사라지면 드디어 퇴근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감각인가! 사라져 가는 냄새를 통해 재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해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되도록 지체 없이, 정해진 시간에 해리 앞에 나타나야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해리는 내가 남긴 냄새가 사리지는 게 좋을까, 싫을까. 내 냄새는 좋지만 이 냄새가 사라져야 내가 돌아오니까 좀 복잡한 마음이지 않을까. 해리에게 물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참 궁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