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주 Feb 15. 2022

행복은 무슨 향이야?

해리와 나 4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런  아침 산책은 해리가 배변을   있도록 잠시 마당에 갔다 들어오는 것으로 때우고 다시 소파에 눕는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해리가 사료 씹는 소리가 거실을 채운다. 밥을 시원하게 비운 해리도 소파 한쪽으로 들어와 눕는다. 그렇게 해리도 다시 잠이 들었나 했는데 중간중간 눈알을 굴려 나의 동태를 살핀다. 해가 뜨고 움직여야  시간이 지났는데 도대체 언제 나갈 생각인 건지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그런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소파에 붙은 몸은 그대로 두고 팔을 뻗어 해리를 쓰다듬으며 “해리야, 사랑해. 근데 언니 오늘 아무것도 하기 싫어.” 말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소파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해리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쉰다. 마치 산책도  나가면서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하는 느낌이다. 나도 안다. 이런   사랑은 공수표이다.

강아지에게 사랑은 몸을 움직여 함께 걷고 함께 뛰는 것이지 소파에 누워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 힘든 날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몸은 누워 있지만 쉬고 싶은 마음과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다툰다. 해리와 함께 살기 전에 이런 날은 버리는 날이었다. 나의 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간순간 갈등하는 마음들을 지켜보다가 하루를 그냥 보내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해리에 대한 책임감이 결국엔 이 모든 분란을 종식시키고 늦더라도 짧게라도 산책을 하게 한다. 결국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 나갈 채비를 . 신이 나서 삥삥 도는 강아지를 진정시키고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을 한번 쓱 둘러보고 골목으로 나가자마자 해리는 코를 박고 냄새맡는다. 간밤에 골목에 수상한 놈이 다녀가지는 않았나 확인하는 것 같다.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매번 저렇게 꼼꼼하게 체크를 한다.

냄새를 맡는 해리를 기다리며 천천히 산책로로 내려간다. 길을 따라 걷자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분명 바닥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무거운 몸과 오늘은 아무것도   없을  같이 무기력한 마음이었는데 신기한 일이다. 시작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해리와 함께 문을 나서면  이렇게 마법 같은 변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나를 문밖으로 끌어내어준 해리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어 애뜻한 눈빛으로 해리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해리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냄새 맡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조금 걷다가 보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던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눈앞의 풍경이 들어온다. 햇빛이 비추고 바다가 반짝 빛난다. 어느새 풀이 자랐고 나무에는 전에  봤던 열매가 맺혀 있다. 항상  자리에 있는 것들이지만 매일 다른 모습이다. 매번 다르기에 순간순간이 새롭고 소중하다. 오늘 발견한 아름다움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 “해리야, 여기  .” 하고 불러 본다. 그렇지만 해리는 경치 구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냄새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 잠시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그래, 너는  좋아하는 냄새나 맡아라하고 나는 나대로 풍경을 바라보고 선.

그런데 갑자기 해리가 산책 줄을 당긴다. 냄새를 쫓다가 산책  끝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덩치큰 녀석이 줄을 당기는 힘은 제법 세다. 더군다나 예상치 한 순간에 을 당길 때는  몸이 휘청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풍경을 보고 풀렸던 마음이 다시 경직되고 신경이 곤두서고 무엇보다 마음이 하기도 한다. 그래서 ! 나는  기다려주는데 너도  기다려줘야지!” 같은 유치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섭섭하다고 해서 강아지가 산책 내내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해리가 나를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아서, 혹은 어떠한 감정을 싫어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우리가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다른 존재와 함께 사는 묘미아닌가.

인간인 나와 강아지인 해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므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물리적으로 동일하다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환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인간인 나는 시각에 대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자극의 70% 시각적 자극이라고 한다. 시각적인 자극을 다른 어떤 자극보다  민감하고 섬세하게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주변의 환경을 인지하는 정보를 얻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시각적 편향은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확인할  있다. 생각해 보면 감각을 묘사하는 어휘 중에서 시각적인 자극을 그리는 표현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강아지는 후각적 자극에 크게 의지하여 살아간다. 대략 50% 정도의 정보를 후각으로 얻는다고 한다.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는 우리는 같은 환경 속에서 살지만 다른 세계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눈을 통해서, 해리는 코를 통해서 지금 이 산책길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맡지 않는다고 해도 각자의 방식을 통해 이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리가 이 산책을 즐기고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리도 분명 나와 같이 즐거운 마음이라는 것을.

물론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우리에게 행복이나 사랑 같은 감정도 다른 모양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 모양이라고 비유하는 자체가 시각적인 편향이 담긴 것이니 ‘다른 느낌일 것이다’ 하고 써야 공평하려나. 만약 행복이 사물이라고 치고 우리에게 이 것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질문을 한다면 인간은 행복을 만나기 전 “어떤 모양일까? 무슨 색일까?” 생각하고 강아지는 “무슨 향기가 날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맞닥뜨리는 순간 인간은 자세히 들여다 보고 강아지는 자세히 맡아볼 것이다. 그렇게 다른 느낌이라도 좋다. 서로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가끔은 해리가 무슨 냄새를 맡고 있나 궁금해서 함께 쪼그려 앉아보기도 한다. 개 코는 아니지만 참 다양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향긋한 풀 냄새, 쿰쿰한 똥 냄새,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흙냄새, 무언가 썩는 듯 비릿한 냄새, 묵직한 거름 냄새나 시큼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가끔은 긴 겨울을 뚫고 올라온 봄나물이나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고라니 똥 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허리를 펴고 걷기만 했더라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발견은 기쁨이고 덕분에 산책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이런 우리에게 완벽한 산책이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 것이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해리는 풀숲에 숨어 있는 또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들을 쫓으며 쾌감을 느낀다. 가끔은 서로의 세상이 궁금해서 쪼그려 앉아기도 하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렇게 천천히 함께 걸어간다.

이전 13화 쓰다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마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