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 무언가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운명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단편영화 시장에서는 한 작품의 운명 기한이 최소 6개월, 혹은 최대 1년 정도다. 매 학기, 매년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에게 쏟아져 나온 영화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것들이 운명을 다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꽤나 짧은 편이다.
졸업 영화를 찍은 지 일 년 하고도 조금 넘었다. 내 졸업 단편 영화는 사장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사장될 위기였다가 최근엔 그 운명을 실감했고 받아들였다.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나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몇 개 없는 배급사에 모두 연락을 돌렸다. 배급사 없이 진행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영화제나 극장에서 틀 수 있는 영상 파일이 필요하고 출품 신청도 수월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영화에 관심이 적거나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부산, 전주, 부천 정도의 3대 영화제를 제외하곤 잘 알지 못한다. 내 졸업 영화는 작은 영화제 2개, 독립 예술품 축제를 포함하며 세 군데 이름을 올린 게 전부다. 물론 어딘가에 내 이름을 건 작품을 올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소규모 영화제라도 이름을 걸고 싶은 연출자들은 차고 넘쳐서 어느 영화제라도 내 이름 석자를 올리는 게 영화를 찍은 자들의 평생소원이다. 물론 영화제라서 수상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내 작품을 누군가 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귀한 일이다. 영화계 데뷔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제 입성은 간절한 꿈의 무대나 다름없다.
웬만하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영화제이지만 영화를 찍고 영화제를 출품하는 게 오랜 꿈이었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결과라 나름 만족했다. 그런데 막상 사장되고 보니 허탈하고 씁쓸했다. 그리 오래가지 않아 영화를 만든 기쁨을 느껴보기도 전에 내 영화는 외장하드에 잠들었고 내 영화를 본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은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타까웠다.
물론 영화를 더 잘 만들었다면 그 유통기한은 더 길었을 것이다. 명곡은 시간이 지나도 명곡이듯이 좋은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좋은 작품으로 남는다. 내 영화는 좋은 작품에 속하지는 않지만 내게 좋은 작품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다 피부로 알 수 있었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관객에게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지, 좋은 작품을 만드는 좋은 연출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많은 돈을 들여 찍은 영화지만, 돈을 주고서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날 더 성장시켰다고 생각했다.
아쉽게 운명을 다했지만 애증의 산물이다. 가장 열정이 넘쳤을 때 영화를 만들 수 있어서 좋았고,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훗날 되돌아봤을 때 언제가 사장될 운명이라도 영화를 만들어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한한 생명을 가졌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듯, 떠나갈 운명이었다면 보내줄 줄 알아야 한다. 억지로 붙잡고 있다고 해서 떠나가지 않을 것도 아니기에 마음이 조금 쓰리더라도 편안하게 놓아주자. 마음만 먹으면 별 일 아니다. 때론 놓아줄 수 있어야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