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도망쳐

by 미래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영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영화보기가 남들처럼 평범한 취미였다. 학교 생활기록부 취미를 적는 란에 특기 적기는 늘 망설였지만, 취미만큼은 당당히 적었다. 사실은 한 반에 취미로만 분류해도 절반 정도는 나올 정도로 너무 평범한 취미여서 대놓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어쨌든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영화를 전공으로 선택한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를 공부할수록 영화 보는 재미는 더 켜졌다. 짧은 시간 공부한 것만으로 수개월 혹은 수년을 걸쳐 고심해 만든 영화 모두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배운 만큼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다. 샷(shot)의 의미, 카메라 무빙의 의도, 시나리오 스토리텔링, 촬영 로케와 미장센 등 더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고 이들을 모두 알기 위해선 영화에 더 집중해야 했다. 영화를 집중해 볼수록 영화의 의미를 더 알아갔다. 지금까진 본 영화만 수백 편은 넘었고 상업영화, 독립 영화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했다. 장르는 공포만 빼면 웬만하면 다 즐겨봤고 특히 드라마 서사가 강력하고 시나리오가 짜임새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에서는 시나리오가 중요하다. 좋은 시나리오여도 영화가 촬영되면 그 시나리오의 여운은 반감된다고 한다. 그만큼 좋은 시나리오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연출에 관심이 생겼다.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 대부분 영화감독을 한 번쯤 꿈꾼다. 자기만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영상화하며 연출하는 모습은 영화를 전공했다고 할 수 있는 자부심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혼자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연출 혼자만 잘했다고 영화가 완성 되질 않는다. 편집, 음향, 미술 촬영, 제작 파트 모두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된다. 편집, 음향, 촬영과 같은 기술적인 영역들은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은 분야다.


아무튼 영화의 여러 분야에서 연출에 가장 관심이 있었다. 내 머릿속 이미지들을 구체화하고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 그 과정 모두를 책임지고 내 눈으로 보고 직접 겪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전공한 순간부터 오로지 목표는 졸업 작품 연출자가 되는 일이었다. 간절했던 만큼 열심히 했기에 다행히 연출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영화를 찍고 나면, 연출자가 되고 나면 영화를 다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찍고 나서 자괴감에 빠져 우울했다. 사실 영화를 찍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영화를 다 끝내고 나니 오히려 허무하고 허탈했다. 처음에는 목표를 이뤄낸 뒤의 상실감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워지지 않는 허탈감에 더 침울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지속해 오다 졸업할 때쯤이 되자 우울감은 회복되었다.


스스로 밝혀 낸 원인은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 것, 생각하고 준비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좋지 않았던 것, 내가 꿈꾸던 일에 대해 민낯을 보게 된 것,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더 이상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영화를 찍어보니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 속 스트레스가 많았다. 첫 연출이었지만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컸고, 그에 비해 결과물이 부족했을 때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 일을 좋아했지만 내가 꾸준히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더 막막했다. 막연히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걸어버리기엔 지치지 않고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힘들어져 영화를 멀리했다. 자주 가던 극장, 영화제도 가지 않았고, 영화 관련 소식들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었다.


그때는 영화 보기가 무서웠다. 영화 보는 자체만으로 재미를 느꼈던 지난 나와 달리 한 컷이라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고 영화를 보던 것에 지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와 거리를 두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나니 내가 내린 결론은 '한 번쯤은 도망쳐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거나 자신이 가야 할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포기해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잠시 도망치는 것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잠깐 쉬어가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조금 더 되돌아보고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집중하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잠시 도망친다고 모든 걸 저버리는 것이 아니니 애써 도망치지 않으려 붙잡고 있을 필요 없다. 너무 힘들 땐 한 번쯤은 도망쳐도 좋다. 자신에게서 답을 찾은 우리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다. 내가 다시 영화 보러 극장에 너무 가고 싶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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