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영하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하고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넘어 영하 17도에 이르는 강추위를 기록하는 날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책상 위에서는 한 겨울 추위를 뚫고 피어난 빨간색과 노란색 카랑코에가 생명을 다하고 시들어가고 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낳고 자라고 소멸하며 그 빈자리는 다시 새로운 생명이 채워나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자연의 이치에 맞게 인류의 문명이 만들어진 이래로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인간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대는 꾸준히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한 때는 신세대였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구세대가 되어 버리고 그 뒤를 이어 다시 신세대가 등장했다. 그렇게 구세대를 밀어내고 신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구세대는 신세대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남긴 기록에는 젊은 세대의 행동을 어리숙하게 여기고 못마땅해하는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기원전 1700년경의 수메르 점토판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며 철이 들라고 훈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청동기 시대 청동의 주요 원료인 주석을 먼 거리를 왕래하며 거래하던 상인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과 함께 다니는 아들을 나약하고 철없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스의 유명한 고전 일리아스에는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도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건만 요즘 젊은이들은 둘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스페인의 볼로냐 대학을 졸업한 프란체스코회 사제였던 알바 루스 펠라기우스(Altars Pelagius)는 1311년 여름에 당시 대학생들의 타락을 지적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정말 한숨만 나온다.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 하고, 선생들의 가르침에 논리가 아닌 그릇된 생각들로 도전한다. 강의에는 출석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릇된 논리로 자기들 판단에만 의지하려 들며, 자신들이 무지한 영역에 그 잣대를 들이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류의 화신이 된다. 그들은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창피해한다. 주일에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대신, 친구들과 마을을 쏘다니거나 집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며 기껏 펜을 든다는 게 연애편지나 끼적인다. 그들은 부모님이나 교단으로부터 받은 학자금을 술집과 파티와 놀이에 흥청망청 써버리며, 그렇게 결국 지식도, 도덕도, 돈도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 글을 보면 요즘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동양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한비자 오두(五蠹) 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今有不才之子, 父母怒之弗爲改; 鄕人譙之弗爲動; 師長敎之弗爲變. 夫以 '父母之愛' '鄕人之行' '師長之智' 三美加焉, 而終不動, 其脛毛不改.
금유부재지자, 부모노지불위개; 향인초지불위동; 사장교지불위변. 부이 '부모지애' '향인지행' '사장지지' 삼미가언, 이종부동, 기경모불개.
지금 덜 떨어진 젊은 녀석이 있어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욕해도 움직이지 않으며,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행실', '스승의 지혜'라는 세 가지 도움이 더해져도 끝내 미동도 하지 않아, 그 정강이에 난 한 가닥 털조차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이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지역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를 자신들의 기준을 바탕으로 자신들과 비교하여 못나고 뒤떨어진 존재로 여겼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향해 ‘요즘 젊은것들은......’이라며 못마땅해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은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 수준과 지적 수준이 더욱 높아지면서 점점 더 빈번해지고 갭도 커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가 그리 급격하지 않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공감할 수 있는 영역대가 넓었지만 세상의 변화가 따라잡기 벅찰 정도로 커진 요즘 시대에는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공감대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종족처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나 요즘처럼 인류의 문명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히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는 아날로그에서 성장한 구세대는 신세대를 쫓아갈 수 없게 되었고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에 익숙해진 신세대는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해 비딱하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구세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음악이나 영화를 보는 일 등은 신세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건만 나이 든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늘 건설적이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라며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인해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는 불신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세대갈등이 늘 일방적이라는 데 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대 간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의 골이 나타날 때마다 항상 상대방을 비난하고 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쪽은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경제도 정치도 언론도 모두 장악하고 있으니 목소리를 내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세대들을 향해 신세대가 이렇게 해야 한다며 늘 변화의 방향과 기준을 제시하려고 해왔다. ‘핸드폰 좀 내려놓고 공부 좀 해라’, ‘게임 그만하고 건설적인 일 좀 해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신문이나 인터넷에는 신세대에게 점잖게 충고하는 나이 든 사람들의 글이 넘쳐나고 있다. 사회의 유명 인사나 오피니언 리더라면 한 번쯤은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글을 싣곤 한다. 주로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는 글보다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조언을 하는 걸까? 왜 나이 든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 신세대의 변화를 요구하는 걸까?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구세대는 신세대가 달라져야 한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직장에서는 신입사원들을 향해 ‘조직은 개인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므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때로는 조직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과거 자신들의 방식을 요구한다. 직장생활을 통해 돈 벌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글에 반드시 직장생활을 통해 돈을 벌 필요는 없으니 돈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주식투자에 뛰어드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을 걱정하는 어른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나이 든 사람들의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까 한다. 강물이 있다고 해보자. 나이 든 사람들은 그 강물을 타고 지금 있는 자리까지 흘러 내려왔다. 그래서 그 강물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앞으로도 그 방향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앞으로 흘러갈 강물의 흐름은 나이 든 세대가 타고 온 강물의 흐름과는 다르다.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려고 한다. 나이 든 세대는 그걸 보며 자기들이 흘러 온 방향으로 물길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억지로 골을 파서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돌려놓으려고 한다.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길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인위적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돌려놓으려는 잘못된 행동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달라지는 시대에는 새로운 세대가 그 주인공이다. 나이 든 세대가 과거에 아무리 빛나는 성과를 만들어냈을지라도 시대가 바뀌면 그 방식은 낡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에는 ‘요새 야구 선수들은 돈을 많이 번다고 자만하여 훈련도 게을리하고 정신상태가 나빠져서 4할 타율을 못 낸다’는 푸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4할을 넘기는 괴물타자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야구의 기술도 발전했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스피드도 빨라졌고 변화구의 종류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러다 보니 타자들의 타격 실력은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과학의 도움 없이 인간의 체력만으로 야구를 하던 시절처럼 4할을 넘기는 타자는 나오기 힘든 환경이 되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물길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기억과 경험만 뒤적이며 ‘라테는 말이야......’를 들먹이면 여지없이 꼰대로 낙인찍히고 대화 상대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는 그 변화가 더욱 급격하다. 과거라면 1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날 변화가 지금은 단 몇 달, 심지어 며칠 사이에 일어나기도 한다.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예전의 방식은 아쉽지만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과거에는 기업을 성장시키고 직원들을 먹여 살리던 제품이나 서비스,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이 앞으로 전개될 세상에서는 더 이상 ‘메이크 센스(make sense)’하지 않을 수 있다. 하루아침에 고객을 잃고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단적인 예가 시가총액 상위 업체들의 변화다. 나이 든 세대가 만들어놓은 기업을 제치고 시가총액 상위에 오르는 신세대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네이버도 카카오도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기업이었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기존 세대를 끌어내리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신세대 기업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세계에서 시가총액 10위 안에 드는 기업 중 상당수는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기업도 있다. 그만큼 세상의 변화는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이 든 세대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변화에 올라 탄 똘똘한 젊은 세대에게 치여 뒤로 밀려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깨닫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싫든 좋든 젊은 세대가 미래의 기업, 미래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갈 주역이라면 그들을 못마땅해하고 나이 든 세대의 사고와 행동에 맞추도록 요구하기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나이 든 세대가 달라지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래는 젊은 세대가 주인공이지 나이 든 사람들이 주인공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선배로써, 그리고 어른으로써 이해심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 주어야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러한 노력들이 사회 곳곳에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과 공부가 부족하다. 젊은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알려고 노력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다.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쉽게 떠나는 젊은 사람을 향해 ‘배가 덜 고프다’ 거나 ‘고생을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더 많다. ‘지방에 가면 사람 못 구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중소기업이 널려 있다’고 하지만 젊은 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미래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 세대 사이의 갈등도 해결하기 어렵다.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이 든 노인들을 폄훼해서 부르는 말)’이니 ‘꼰대’니 하며 서로 간에 반목만 심해지고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주역이다. 미래는 나이 든 세대가 아니라 신세대의 손에 달려있다. 역사는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며 나이 든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 반드시 젊은 세대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가르치고 그들 입맛대로 젊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바로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젊은 세대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도, 조직도, 기업도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젊은 세대를 어떻게 조직에서 활용하고 그들이 바꾸어 나가는 시장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조금 더 현명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