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세대(The Next Generation)
미래세대에 대한 정의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책에서 다루는 신세대가 누구이며 어떠한 환경에서 낳고 자랐는지 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보이는 행동은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기가 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직후인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세대를 사람들은 ‘베이비 붐 세대’ 혹은 ‘베이비 부머’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전쟁의 고통이나 혹독한 불경기를 겪은 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를 일컫는다. 서양에서는 보수적인 이전 세대와 달리 성해방과 반전운동, 비틀스, 히피문화, 록음악 등 자유를 추구하고 다양한 사회문화운동을 주도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정치적 격변기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쳐 경제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등 급변하는 경제성장 과정을 관통하며 살았다. 베이비 붐 세대는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노부모의 봉양과 자녀 교육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며 가정과 회사를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빠른 세대는 이미 사회에서 은퇴하였으며 대다수가 은퇴를 앞두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를 X세대라고 한다. 학자에 따라 시작 시점을 1965년부터라고 하기도 하고 1966년부터라고 하기도 하는데 똑 부러지게 정의된 시기는 없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X세대라는 말은 1991년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Douglas Coupland)의 소설 <X세대(Generation X)>에서 유래되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3명의 젊은이들이 단조로운 고향 생활을 벗어나 캘리포니아의 외진 사막에서 구속된 삶을 벗어버리고 좌절과 번민을 논의하는 것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기업의 마케팅이나 광고 담당자, 매스컴 종사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달리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더글러스 커플랜드의 소설 제목을 따와 X세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X세대는 이전 세대가 지켜온 가치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다양한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경제발전과 함께 과소비와 향락을 추구하기도 했는데 한 때는 압구정을 중심으로 ‘오렌지 족’이나 ‘야타족’과 같은 것들이 성행하기도 했다. 대중문화에 열광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이후 베이비 붐 세대가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이들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이들에게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라는 이름을 붙였다. 주로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의 세대 전문가인 닐 하우(Neil Howe)와 윌리엄 스트라우스(William Strauss)가 1991년 출간한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Generations: The History of America's Future)‘에서 처음으로 ’밀레니얼 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들이 청소년기를 맞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됨으로 인해 컴퓨터나 네트워크 등 IT 기기 사용에 능통하기 때문에 ’테크(tech) 세대‘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타임지는 이들이 타인이나 조직을 위해 자기 가신을 희생할 줄 알았던 과거 세대와는 달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고 불렀으며 한편으로는 ‘새천년 세대’로 부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하여 대학 진학률이 높고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자기표현 욕구가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온라인 쇼핑과 게임을 즐기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에 능하다. 성장과정에서는 비교적 풍요롭게 자랐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사회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취업이 어려워지고 비정규직 등으로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는 시기의 첫 번째 희생자 집단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 세대에 비해 평균소득이 낮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으며 결혼이나 내 집 마련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등의 자조적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득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금융위기로 인해 투자를 꺼리고 소비를 줄이는 성향이 있다. 혹자는 이들에게 X세대 다음 세대라는 의미에서 Y세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안개처럼 알 수 없다’는 의미의 X와 비교하여 Y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세대에는 Z세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X, Y, Z로 이어지는 알파벳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는 셈인데 Z 역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용어임에도 이것이 쓰이는 걸 보면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이들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용어를 찾지 못한 듯하다. 학자에 따라서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MZ세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즉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부를 정도로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용어는 미국의 교육학자인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가 2001년에 자신의 논문인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이민자(Digital Native, Digital Immigrants)’를 통해 처음으로 언급한 단어다. 그는 신세대가 컴퓨터나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된 시기에 태어나 그러한 환경에 익숙하고 모바일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마치 신체의 일부분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기존 세대와는 달리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한다고 정의했다.
이처럼 190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존재해왔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구분은 하지 않았지만 기존 세대와 다른 신세대는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젊은 세대를 밀레니얼인지, Z세대인지, 아니면 MZ세대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지금 사회에 첫발을 갓 들여놓은 20대 중후반부터 소비의 능력을 갖추고 곧 사회에 합류하게 될 1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를 통칭하여 젊은 세대라고 하고 그들을 미래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래세대’라고 부를 예정이다. 연도 상으로 구분하면 1990년대 초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데 학자들이 구분하는 세대보다는 조금 더 좁은 범위의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혹자는 세대의 구분 없이 80년생, 90년생처럼 10년 단위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의미 없는 구분이라 여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요즘처럼 세상이 급변하는 시절에는 불과 5년만 지나도 세대차이가 난다고 여기는데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묶어서 획일적으로 같은 특성을 지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90년생과 99년생은 태어났을 때의 주위 환경도 다르고 사고나 행동도 완전히 다르다. 99년생에게 90년생은 ‘화석’이나 다를 바 없다. ‘화석’이라는 말은 대학생들이 자신들과 큰 차이가 나는 학번을 가진 선배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용어이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어쩌면 스마트폰의 등장 전후로 구분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삶은 스마트폰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인류의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스마트폰 등장 이전(BS, Before Smartphone)과 이후(AS, After Smartphone)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 변화는 심오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은 2007년 이후이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은 2009년 말이나 2010년 초반이므로 그들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아직 어리다. 그렇다고 몇 년부터 몇 년까지라는 식으로 마치 두부를 자르듯 특성을 구분할 수도 없으므로 젊은 세대를 10대 후반부터 20대 중후반 정도, 18세~28세 정도로 구분하려고 한다. 물론 그 앞뒤의 나이 대를 포함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겠으나 내 자신이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건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저 미래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세대라는 의미로 ‘미래세대’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미래세대의 사회적 배경
미래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반 정도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나 성인이 되어 드러나는 모습은 환경적인 요인이 영향을 많이 미친다. 따라서 미래세대가 속해 있는 집단의 환경을 살펴보면 그들이 보이는 사고와 행동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미래세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경제적인 측면일 텐데 그들이 맞닥뜨린 경제적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말 그대로 ‘고도성장’의 시기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었다. 매년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10%를 훌쩍 넘도록 좋아지는 시기였다. 기업도 국민도 모두 성장의 결실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직장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러기에 누구든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직장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고 대학생활 동안 취업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다. 공채시험을 앞두고 개인적으로 시사나 상식과 같은 과목을 준비하는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입사 문제를 분석하고 면접 준비를 하는 등의 정형화된 장기간의 취업준비는 없었다. 졸업 전에 어학시험을 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직장에서도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그만두거나 큰 잘못을 저질러 해고당하지 않는 한 정년퇴임까지 회사 밖으로 밀려날 걱정이 없었다. 한 번 직장에 들어가면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분위기였고 직원들 역시 ‘회사에 뼈를 묻겠다’며 평생직장으로 알고 다녔다. 매년 임금인상 폭도 컸고 능력보다는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졌기에 승진도 비교적 빨랐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모으면 큰 부자가 되지는 못해도 자녀교육이나 내 집 마련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시기였다.
반면에 노동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기계처럼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근이나 철야, 주말 근무는 당연했고 일주일이 휴일 없이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야 했다. 추가 근무에 대한 보상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휴가조차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아이의 출산을 지켜보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회사에 대한 충성으로 자랑하는 시대였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삶 따위는 기꺼이 희생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기업에는 유교와 군대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연공서열과 직위에 대한 위계질서가 명확했고 ‘까라면 까’라는 식의, 마치 수돗물이 흘러가듯 일방통행 식으로 일처리가 이루어지곤 했다. 비록 이해할 수 없더라도 상사의 명령은 곧 하늘처럼 여겨지던 시기였다. 성희롱이 만연한 건 물론이요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언어폭력이나 소위 말하는 ‘재떨이’를 던지는 등의 물리적 폭력도 만연되던 시기였다.
이 당시의 생활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1980년의 대한민국 명목 GDP가 650억 달러라는 통계가 말해주듯 나라 전체가 가난했고 사람들의 삶이 모두 하향 평준화되어 있었기에 빈부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보듯 부자라고 해봐야 번듯한 2층 양옥집에 남들 가지지 못한 첨단 전자제품을 가지고 있는 수준일 뿐이었다. 물론 이 시절에도 가난한 사람은 끼니를 잇기 어려운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집값도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1988년 기준,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 7단지의 평균 매매 가격은 4,000만 원으로 평당 285만 원이었다. 같은 해 강남구 개포동의 아파트 가격은 3500만 원으로 평당 249만 원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강북에 비해 낮았다. 이때 노동자 임금은 연 430만 원으로 월평균 36만 원 수준이었기에 다소 버겁기는 해도 허리띠 졸라매고 부지런히 돈을 모으면 직장생활 20년쯤 되는 40대 중반에는 대출을 받으면 내 집 장만도 가능했다. 예금 금리 역시 1970년대는 평균 16.1%, 1980년대는 10.2% 수준으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을 뿐 아니라 복리상품도 있었기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모으면 집을 장만하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가난한 삶에 비해 대학 등록금은 다소 비싼 편이었다. 1975년에 27만 원 수준이던 등록금은 1980년에 71만 원, 그리고 1985년에는 120만 원 수준이었다. 여전히 가계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고 소를 한 마리 팔아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로 대학을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과외 등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하면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