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오래된 집

by 열음

할머니가 엄마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날 이사박스를 들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오래된 집 안에는 할머니의 취향, 편리함에 따른 물건들이 가득하고 언제 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약, 화장품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안방부터 시작해야지.' 안방에 오래된 장이 있는데, 그 위에는 tv가 있다. tv 아래에는 정말 자잘한 물건들이 많았다. 매일 쓰는 이쑤시개, 코를 뚫어놓은 마스크, 불편하다며 양말을 잘라 접어놓은 것까지. 한 칸 한 칸 비울 때마다 할머니에게 중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국가 유공자로 돌아가셔서 국가 유공자임을 증명하는 물건들은 소중히 챙기고, 매일 쓰는 화장품과 아끼며 모아 놓은 보석들은 작은 보석함에 담았다.


할머니 방에서 가장 소중하게 들고 온 건 일기장이다. 2017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간간히 쓰여 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패딩 속에 넣었다. 혹시나 다른 물건이랑 섞이면 .. 버려지면 .. 안되는데 생각하며 쓰레기와 소중한 물건을 분류하는 와중에 손에서 놓지 않았다.


참 배움에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학교를 보낼 돈이 없어 안 보낸다고 하자 낮에는 간호 일을 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할머니의 한쪽 방에는 화이트보드가 있고 주식 종목 코드, 우리 가족 생일과 전화번호, 중요하게 메모 할 것들을 적어놓았다. 종이 뭉치를 들춰보니 신문 사설을 아주 가지런하게 필사해놓았다. (할머니의 필체를 보면 명필이 따로 없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할머니의 피를 받아서일까? 할머니는 종이와 펜을 가까이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가져올 게 없다고 생각했던 집에서 할머니의 인생을 톺아보니 5년 전, 10년 전의 모습이 그려졌다. 혼자 tv를 보다 해 보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공책에 적어놓는 모습, 딸에게 전화가 오면 기뻐하며 휴대전화를 열어보던 모습, 산책을 가기 위해 쓰고 싶은 모자를 고르고 신발을 신는 모습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나의 취향에 집중하며 살면서 가족들의 취향에는 무심했다. 할머니가 뭘 잘 먹는지, 어느 계절을 좋아하는지, 어떤 시간을 좋아하는지, tv 프로그램은 뭘 즐겨보는지, 어떤 책을 재미있어 하는지, 과일은 뭐가 맛있는지 전혀 몰랐다. 같이 산지 4일 되는 날인 지금도 할머니가 먹는 음식과 안 먹는 음식을 새롭게 알며 지내고 있다.


할머니, 미안해. 할머니가 좋아하는 걸 미리 물어보고 알아두면 좋았을텐데. 언제나 다 좋다는 할머니 말에 내가 좋아하는 거 먹기 바빴던 것 같아. 지금이라도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면서 먹고 싶은 거 알아가고 안 먹어 본 것도 먹게 해주고, 날 따뜻해지면 벚꽃보러 가는 게 내 소원이 됐어. 할머니, 너무 쓸쓸하게 둬서 미안해. 할머니, 혼자 매 끼니 챙기게 해서 미안해. 지금부터라도 내가 열심히 하면 용서해줄래?


아래는 할머니 일기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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