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는 순간 성장을 멈추고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이기적 유전자'들의 생각일 뿐. 속지 말자. 인간은 평생을 통해 성장하고 자식은 나의 분신이 아니다.자식은 나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초대받은 소중한 생명체이지만 엄마 또한 애를 낳았더라도, 유전자를 남겼더라도 계속 성장하는 존재이다. 120세 인생에서 고작 30~40대인 엄마들이 자기의 성장은 외면한 채 아이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떠먹이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육아를 하면서 모든 것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겪는다.
심지어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라는 말도 그렇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그냥' 좀 행복하면 안 되나?아이를 위해서 유기농 재료를 고르고 아이를 위해서 비싼 전집을 사고 아이를 위해서 외출 장소를 정한다. 주말이 주말이 아니다. 엄마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면 독립운동쯤은 해야 쟁취할 것 같은 '자유부인' 타이틀이 있어야 가능하다.같은 돈으로 아이의 전집을 사느냐 엄마의 새 옷을 사느냐는 질문에 갈팡질팡하며, 내 옷 사겠다고 간 백화점에선 아이 코너만 한참을 구경하고 있다. 나는 그냥 있는 거 입어야지, 아이 전집을 먼저 챙기게 된다. 설령 한 번쯤 나를 위해 돈을 쓰게 되면 이걸 사도 되나? 수백 번 자기검열하고, 환불할까 고민하고, 이걸 아이거로 환산하면 얼마인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아이의 장난감은 중고로 구매했는데 내 옷은 새 걸로 사도 되나? 나 제대로 된 엄마 맞아? 자학도 해본다.
모든 선택에서 기준이 아이를 위한 일이냐가 되면 서서히 나의 경계는 사라진다.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들 속에서 나의 존재는 뒷 배경이 되어버린다. 아이들에게만 에너지를 쏟을수록 나는 서서히 고갈된다.
메마른 펌프에서 물을 끌어올리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한 명의 인간으로서 숨 쉬고 생각하고 먹고 말하는 시간은 그런 마중물과 같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이의 것과 내 것을 저울에 올려놓고 경중을 따지는 것을 그만두고 각각의 저울에 따로따로 올려야 한다. 아이들이 내게 중요한 만큼 나 자신도 나에게 소중함을 기억하고 억지로라도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쏟을 에너지를 뺏어와서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육아라는 긴 마라톤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을 찾는 과정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그랬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방향을 잡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나침반 바늘 끝이 떨리는 것이라고,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고장 난 거라고.
나는 매일 끊임없이 떨려가며 나와 남편과 세 아이로 이루어진 오각형의 무게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평화는 모두가 불행한 것보다 못하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은 모두가 모두에게 울타리가 되되, 어느 누구에게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모습이다.
일시적 행복보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꿈꾼다.그것은 스스로에게 되뇌는 약속이기도 하다.
'엄마표'가 붙은 것들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점차 엄마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에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예쁜 식판에 색색깔의 반찬이 올라가는 '엄마표 유아식', 옹알이를 할 때부터 일상에서 영어로 말을 걸고 노래를 불러주고 영어 영상을 틀어주며 영어를 노출시키는 '엄마표 영어'. 아이에게 여러 권의 전집을 개월 수 따라 다르게 들이고 매일 일정한 양의 책을 읽어 주는 '엄마표 책육아'.
나는 이런 엄마표들을 바라보며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는데 엄마표 책육아를 보면서는 약간 기이함마저 느꼈다. 책이란 게 뭔가 매일 의무적으로 먹여야 하는 영양제라도 된 거 같아서 그것을 먹여주는 것이 엄마의 의무라고 말하는 듯해서였다. 그러니까 엄마표 책육아를 하려면 개월 수에 맞는 전집을 골라 집안에 적절할 때에 들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균형 있게 노출하며 매일 일정한 양을 읽어줘야 하는 일련의 활동을 엄마 주도로 해야 하는 거였다.
책이란 필수 영양제인가?그럼 언제까지 먹여야 하는 영양제인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영양제인 건가? 의문이 들었다. 책육아를 왜 할까? 아이가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기에. 대학도 잘 가면 더 좋고.는 숨겨져 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거라면 아이에게만 필요한 걸까? 엄마 아빠에겐 더이상 안 필요한 영양제일까?
우리에게 스마트폰은 이미 일종의 인공장기가 되었다.
손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항상 가까이 있고 예전이라면 뇌가 했을 기억들을 의존하며, 질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검색을 할 수 있을 만큼 문제 해결의 즉각적 도구가 되었다. 자칫 스마트폰을 두고 나오면 뇌의 일부를 두고 나온 것 마냥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어른들은 스마트폰에 눈과 손을 빼앗긴 채 아이들에게만 수십 권의 전집을 들이미는 것은 어색하지 않나? 창과 방패를 동시에 맞붙이는 모순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어른의 행동을 지켜본다.
채소 반찬을 먹으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맛있게 매 끼니 채소를 먹는 어른을 보는 것이다. 색색깔의 채소 반찬을 차려 놓고 부모는 햄만 먹는데 왜 우리 아이는 채소를 안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채소를 먹일 수 있는지 묻는 꼴이다. 아이에게 채소를 먹이고 싶다면, 어른부터 채소를 끼니마다 꿀단지 꺼내듯 꺼내 먹고, 아이에게는 일부러 조금만 줘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맛있게 먹는 저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을까?책육아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라는 어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틈만 나면 책을 보는 부모를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책은 그런 채소 같은 음식이였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틈만 나면 꺼내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무엇. 아이에게 책육아를 하기 전에 나부터 책을 읽고, 책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가족의 문화 속에 책이 녹아든다면 책육아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아이가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아이 눈에 비치는 부모의 모습이 부모의 말보다 세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내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실천하면 어떨까? 사실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은 결국 부모 스스로에게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정보를 탐닉하기보다는 지혜를 찾고 궁금증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대하는 성숙한 어른이 먼저 되는 것.
‘엄마표 책육아’를 하기 전에 엄마 스스로를 책으로 키워보는 게 우선이다.비행기에서 산소호흡기를 부모가 먼저 쓴 후에 아이에게 씌우라고 하듯, 어른들의 삶에서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권하려면, 최소한 내가 맛보기는 해본 것을 권유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고 생각한다. 좋다고 하는 것들을 무작정 떠먹이는 부모가 아니라, 먼저 한입이라도 먹어보고 아이에게 권해보는 것은 어떤 '엄마표'가 와도 기억해야 할 말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을 우선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실천하기!
아이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구분되어 있다.
나의 성장에서 아이들이 감화를 받고 좋은 영향을 받아 책을 가까이한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한다. 스스로 성장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엄마의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아 엄마는 이런 사람이구나. 엄마가 재밌게 보고 있는 저 물건은 뭘까’ 궁금해하며 책등을 한 번이라도 더 만져보고 펼쳐보고 손발에 채이는 책들을 무심결에 열어도 보며 그렇게 친해진다면 좋겠지만, 아니면 말고다.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부모가 필요한 시기는 짧고, 언젠가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 자기만의 뿌리를 내릴 거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의 세상에서 사라질 존재다.
날려 보내기 위해 새를 키우는 심정으로 아이를 키운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 보다 자립하도록 만드는 게 나의 육아의 목표이다. 아이들이 내 말을 듣고 따라 하기보다는 스스로 부딪혀보고 깨져가면서 홀로 일어서길 바란다. 야생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개척정신과 자립심을 길러주고 싶다. 그러려면 나의 시선은 어디로 가있어야 할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의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나 자신.아이들을 낳고도 여전히 한 명의 인간으로서주체성을 가진 성인으로 끝없이 성장하는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하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듯, 그렇게 나 자신을 잘 해주고 싶다. 좋은 곳에 데려가 맛있는 것도 먹이고, 좋은 것도 보여주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싶다. 자꾸 아이에게만 향하려고 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게 하고, 아이들에게만 쏟아부으려고 하는 물과 영양분을 스스로에게도 주고 싶다. 나라는 인간의 미래지향성을 응원하며.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이루고 싶은 일이 무언지 끊임없이 묻고 싶다. 매일 성장하는 나로서 살고 싶다. 내가 공부해서 내가 성장하는 것이 가장 기쁘다.
뜨거운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클수록 그 아래에 더 많은 사람이 쉴 수 있다.
내가 성장할수록, 내가 드리우는 시원한 그늘의 평수가 넓어질수록, 아이들이 그 속에서 뒹굴며 느끼고 배울 것이 더 많아질거라 믿는다. 나는 엄마표 공부보다 엄마만의 공부, 엄마가 성장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공부, 나는 부지런히 읽고 쓰며 나의 우물의 평수를 넓혀가는 것을 나의 공부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