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환경에서 같이 자랐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삶
동생이 결혼했다. 연애도 결혼도 할 것 같지 않았던 동생이 막상 결혼을 하니 어안이 벙벙하고 실감이 안 난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자주 묻거나 쇼핑을 함께 가거나 단둘이 여행을 가거나 매일 싸우거나 하는 자매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 형제 같았다. 서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이 살아온 시간의 두께만큼 서로가 필요할 때에는 조용히 옆에 있어주었다. 내가 첫째 아이를 낳고 주말부부를 할 때엔 동생이 와서 함께 쪽잠을 자며 밤에 수유를 도와주기도 했다. 동생이 필요할 때엔 나도 옆에서 도와줬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나도 그렇고 내 동생도 그렇고 정말 연애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여중 여고 여대라는 공통점을 가져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내 주변의 친구들이 잘만 연애를 한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우리가 둘 다 연애에 소질이 없었던 것은 집안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면 가족친화적이고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많은 대화와 통금이 공존했다.
세 살 터울로 자란 우리는 우리 가족의 역사를 함께 했지만 전혀 다르게 자랐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을지 몰라도 서로의 생각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나는 엄마 아빠와 자주 언쟁을 하며 자랐지만 동생은 딱히 엄마 아빠와 언쟁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내뜻대로 안되면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했다면 동생은 애초에 걱정을 시킬만한 일이면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둘 다 처음으로 데려와서 부모님께 소개해준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만이 우리 둘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연애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가끔 동생이 '어떤 마음이면 결혼을 결심하게 되냐'는 질문을 할 때 언뜻 동생이 연애를 하긴 하는구나 생각했다.
나와 달리 동생은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혹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며 불안을 달랬다면, 동생은 조용하게 혼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보면 언니와 동생이 바뀐 것처럼.
나는 대학도 급하게, 진로도 급하게 결정했다면 동생은 신중했다. 어떨 때는 동생이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을 저렇게 공부만 하며 보내는 것에 안타깝고 연애나 결혼은 언제 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동생은 자기만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 대학에 가서 스물넷에 임용시험을 봐서 교사가 되고 스물아홉에 결혼을 했다. 간신히 아이를 낳고는 또 성급하게(?) 쌍둥이를 낳아 아이가 셋이 되었다. 그에 반해 동생은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가고 대학에 가서도 다시 진로 고민을 하고 졸업 후 약학대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약대에 들어가는 과정도 힘들어 보였는데 들어가서도 공부량이 어마어마했다.
"언니랑 동갑인 신입생도 많아!" 라며 나에게도 권했는데 나는 어쩐지 용기가 안 났다. 임용시험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 시험 인양 질리게 공부했던 나는 다시는 시험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되겠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한 것 같다. 고작 동생과 3살 차이밖에 안나는 나이임에도 나는 끝이 가늠이 되지 않는 시험에는 애초에 발을 담그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다. 임용시험에서도 한번 떨어졌을 때 슬프기보다 화가 먼저 났던 나였다. "아니 이만큼 공부했는데 떨어지면 때려치워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성격이 급해서 오래 매달리는 시험에는 젬병이었다. 바로바로 결과가 나와야 속이 시원했다. 급한 성격은 추진력은 크지만 끝까지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는 시험에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나는 급한 성격 덕에 대학도 취직도 결혼도 빨리 한편이지만 인생은 '빨리 했다는 것이 성공'을 의미하는 단거리 시합이 아님을 차차 깨달았다.
나는 외향적이고 동생은 내향적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동생은 차분하다. 이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차분한 동생을 보고 있으면 같은 뱃속에서 나와도 어쩜 이렇게 다르게 클 수 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기분은 내가 막상 아이를 셋 낳고 나서 내 아이들을 보고도 같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인생을 너무 속성으로 살려고 하는 나는 동생을 보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어쩜 저 상황에서도 저렇게 태평하지? 물론 백조의 발길질처럼 물속에서는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20대 전체를 공부와 시험에 쏟아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서른넷에 결혼하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으니 딱 좋은 나이에 결혼을 하는구나 싶었다. 자기의 노력으로 일군 성과로 자기 밥벌이를 하며 불안과 고뇌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스스로 우뚝 설 수 있을 때에 결혼을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내가 조바심을 냈던 모든 일들은 그렇게 촉박한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수능을 망치거나 시험에 실패를 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치거나 실패를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평생을 통해 삶에 대답을 하는 것이니까. 꼭 스무 살에 대학을 가야 하는 것도, 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야 하는 것도, 꼭 결혼을 하면 애를 바로 낳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꼭 그때 해야 한다'는 없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모의 결혼식날 화동을 한 딸아이는 결혼식이 끝나자 슬프다고 말했다.
"인제는 이모 못 보는 거야?"
5살 인생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어떤 과정으로 찾아오는 걸까? 아이의 말에 내 마음도 울렁였다. 사람들은 모두 때가 되면 자기의 자리를 잡는단다. 속으로 속삭이며 어느덧 나는 시간을 훌쩍 뛰어 30년 후 딸아이의 결혼식장에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동생이 자기만의 시간표대로 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뿌듯한 이 기분처럼 딸아이의 결혼식에서도 슬픔보다는 뿌듯함과 대견함을 느끼고 싶다.
아빠가 언젠가 '자식을 결혼을 시켜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다. 벌써 자식을 두 명이나 결혼을 시키고 뿌듯해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우러러 보였다. 어릴 때는 멋도 모르고 "나는 엄마 아빠처럼 답답하게 안 살 거야!"라고 했었는데.. 막상 부모가 되어보니 우리 부모님처럼 자식을 키워 결혼시키는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새삼 느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자식을 낳아 기르고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며 나도 겸손해짐을 느낀다. 나의 이 급한 성격도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면서도 조바심 내지 않는 삶.
흔들리지만 휘둘리지는 않는 삶.
앞으로의 삶은 그렇게 걸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