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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Aug 12. 2022

워라밸 아니고 육라밸

엄마가 아니고 연인이 되는 시간

남편과 살면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많이 했는데 최근에 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은 남편의 근무시간을 줄이는 결정이었다. 사실 돈만 생각한다면 남편이 일을 많이 할수록, 출근이 이르고 퇴근이 늦을수록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도움을 받을 사람을 쓰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덜 벌고 조금 더 같이 있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았고 결정적으로는 3살 1살 1살들을 5살 3살 3살로 키우며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이 필요했다. 지금도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을 고민하는 것보다 씀씀이를 줄이는 것을 고민하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 쓰고 나면 기억도 안 날 것들 때문에 아이들을 아빠와 오래 떨어져 있게 하고 싶지 않다. 


일을 줄이는 결정을 하게 된 건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아이들의 아빠이기 이전에 나의 연인이기에. 나는 여자로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남편은 남자로서 나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쥐어짜서라도 만드는데 단둘이 연인으로 보내는 시간 덕분에 평소의 세 아이 육아라는 과중한 부담을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쌍둥이를 낳은 날 뉴스에서는 우한 폐렴이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나왔다는 기사가 연이어 나왔다. 남편에게 일을 쉬기를 권했다. 세 달 정도 함께 신생아 둘과 첫째를 같이 돌보며 오롯이 아이를 같이 키우고 나서 다시 새로운 직장을 찾아볼 때가 왔다. 우리는 '돈이냐 시간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일을 많이 할수록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주 6일을 일하는 것부터 주 3일을 일하는 것까지. 업무의 양의 스펙트럼들을 펼쳐보며 우리는 어디쯤에서 멈출지 고민을 했다. 둘이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속 시원한 답이 안 나오자 남편은 4살이 된 첫째에게 물었다.


00아, 아빠가 일찍 와서 놀이터에 같이 가는 게 좋아? 아니면 장난감 사 와서 늦게 오는 게 좋아?


첫째는 아빠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노이터!!


그즈음 놀이터에서 노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첫째의 대답에 남편은 장난감 대신 놀이터를 결정했다. 주 4일 일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언젠가 첫째가 아빠랑 함께 가는 놀이터 대신 장난감 혹은 다른 무언가를 원할 때까지는 첫째의 옆에 있어주기로 했다. 일찍 하원해서 신나게 아빠와 노는 시간을 갖게 된 첫째는 동생이 갑자기 둘이나 생기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잘 적응해주었다. 남편이 주 4일 일하게 되면서 생긴 또 하나의 장점은 우리 둘만의 평일 낮시간이 생겼다는 점이다. 목요일은 부부의 날이다. 아침을 든든히 먹여 세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오면서는 나는 남편과 팔짱을 낀다.


오늘은 뭐할까?

 

발이 둥둥 뜬다. 일주일 중 6일은 엄마 아빠로 사는 우리에게 목요일 딱 하루 낮시간은 연인으로서 보내는 시간이다.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아이쇼핑도 하고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기도 한다. 어느 기념일에는 배쓰밤을 사들고 새로 생긴 호텔에 대실도 해보았다. 신선하고 재밌었다. 연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일주일을 버틸 힘을 얻는다. 


나중에 나이 들고 은퇴해서 아이들이 모두 독립을 하고 나서 덩그러니 둘만 있을 때를 생각해본다. 그때가 되어서야 함께 있는 시간을 잘 보내보려고 애쓰기보다는 지금부터 잘하고 싶다. 먼 훗날 말고 오늘 다정하게 지내고 싶다.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니 나중에 말고 지금 아껴주고 싶다. 애정이 넘쳐나서 잘해주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잘해주다 보면 애정이 생긴다. 남편이 아이들의 아빠이기 이전에 내 연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남편은 주 4일을 일하는 대신 다른 평일은 퇴근이 늦다. 혼자서 9시까지 아이 셋을 종종거리며 먹이고 씻기고 재우다 보면 심해에 빨려가듯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런 순간마다 목요일을 떠올린다. 목요일에 이걸 먹어야지, 여길 가봐야지. 이 생각을 하며 순간의 고비를 넘긴다. 육아처럼 장기간의 마라톤을 할 때에는 먼 미래의 큰 보상보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작은 보상이 더 낫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니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애정을 느낀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이 순환의 고리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빡빡하고 숨 막히는 시간들 속에서 억지로라도 틈을 벌려 단둘이서만 보내는 시간을 만든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처음의 미세한 간극을 빨리 채우지 않으면 금세 금이 그어진 그릇이 깨지듯 관계가 멀어진다. 부부 사이에서도 지금 미세한 간극을 채워야지 나중에 벌어질 대로 벌어진 간극을 채우려고 돈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지 않다. 남편과 자주 잘 놀고 싶다.


가끔 누워서 같이 뒹굴거리다가 물어본다.


무슨 생각해? 무슨 고민 있어?


아무 생각이 없어, 아무 고민도 없어. 지금이 딱 좋아.


남편의 대답을 들으면 신기하다. 하루에도 최소 열두 가지 생각은 BGM으로 머릿속에 깔린 듯 재생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머릿속을 텅 비우는 데는 선수다.


욕심을 줄이던지 욕심에 맞게 노력을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욕심에 맞게 노력을 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욕심이 없는, 정확히 말하면 인생에서 만족을 잘 찾는 남편을 만나서 나는 삶의 새로운 방식을 배웠다.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자주 머리를 비워내는 것이 삶의 기술이라는 것을 배웠다.


남편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연인이 필요하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나를 살게 해 주고 마음껏 날아오르게 해주는 사람이 내게는 필요하다. 그게 남편이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애먼 데 에너지를 쏟아야 했을 테니까.


오늘 너무 좋았어! 애들도 수월했고!


아이들을 셋다 재우고 둘이서만 거실 식탁에 마주 앉아 육아 퇴근을 함께 자축한다. 좋아하는 칵테일을 한잔씩 나눠마시며 대화하다 보면 세상에 남부러울 게 없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뿐이다. 하루하루를 살 바에 기왕이면 잘 살고 싶다. 내게 잘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순간을 많이 누리는 삶이다. 그건 남과의 비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전에 누워서 오늘 하루 잘 보냈다는 것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느낄 때에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힘으로 또 하루를 버틸 힘을 갖는다.


그리고 이 힘으로 우리앞으로 올 고비들도 부드럽게 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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