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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진 Oct 24. 2020

고마움을 표현한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잘은 몰라도 전자는 생각이 많은 사람일 거라 짐작을 해본다. 반면에 후자는 생각은 물론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고마움을 애써 표현하려는 사람은 베풂에 있어서도 소홀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자체가 베풂을 뛰어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세심한 마음, 즉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니까. 사소한 선의에 누군가 고마움을 표시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사려 깊게 느껴졌던가? 작든 크든 어떤 보답을 받으면 선의는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고마움이 고마움을 덮어버리곤 했으니까 말이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뭐랄까?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살아온 세월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곧게 살아온 시간이 자연스레 입혀준 옷이라 말할 수 있다. 사실 누구나 고마움이 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표현할 줄도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다고 생각하는 고마움에 대해서만 표현을 한다. 확연히 눈에 보이는 고마움에 대해서 말이다.


작든 크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래서 특별하다. 애써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 보통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사람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고마움을 빼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줄도 알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큰 고마움을 이끌어내기도 하니까. 물질이든 아니든 고마움을 누군가에게 받았을 때, 그 안에 담긴 진심에 자신의 진심을 더해 갚아주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내가 한참 영업에 매진했던 시절에 인연을 맺게 된 회장님이 있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회장이었지만 그 모습은 회장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직함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젊고 밝은 회장님이었기 때문이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훤칠한 키가 흡사 패션모델을 연상케 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주 환한 미소였다. 회장님은 시종일관 웃으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고, 내 제안을 불편한 기색 없이 흔쾌히 받아주었다. 사실, 큰돈이 오고 가는 상황에 쉽게 사인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회장님과 나는 계약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냥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계약과는 별개의 이야기를 하며 웃음만 주고받았으니까 말이다. 사인만 안 했을 뿐, 이미 계약은 성사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계약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회장님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미 계약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회장님과 나 사이에는 그저 웃음밖에 없었다. 웃음이 사라지면 옅은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또 미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웃음을 대비한 채, 계속해서 대화가 이루어지곤 했었다.


회장님은 상품을 구입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 어쩌면 갑을 관계가 형성돼야 했지만, 그런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매개체는 상품이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다. 진심과 진심이 소통했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를 배려해 주고 존중해 준 회장님의 몫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결코 그런 관계가 만들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성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정작 자신은 낮추고 상대방을 띄워줄 수 있는 인품이라고 말이다.


그 이후로도 회장님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연락이 뜸해졌다. 그 점이 매우 아쉬웠지만 연결고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연락을 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회장님과 나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단 한 번도 회장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고마운 고객님들 중에 유독 빛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배도 비슷했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무척이나 존중을 해주었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년 전 회장님과 마지막 통화 후, 오랜 시간 연락이 없었다. 속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그 기회란 내가 만든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얼마 전에 용기를 내어 회장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두 번째 책이 나온 시점이기도 했고, 그간 말로는 전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책과 함께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이틀에 걸쳐 쓴 편지를 다듬고 또 다듬어, 남색 편지봉투에 넣어 새 책과 함께 등기 발송을 하는 순간,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읽힌다는 보장도 없었고, 나에 대한 기억 역시 다를 수도 있었기에 약간의 불안감이 있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등기로 보낸 편지는 예정대로 다음 날 도착했지만, 하루가 지나도 또 이틀이 지나도 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괜한 일을 벌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편지가 불편함만 주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작업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날, 핸드폰에 진동과 함께 낯선 번호가 떴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 뜬금없이 00 백화점 배송센터라고 하며 내 이름을 확인했다. 나는 전화가 잘못 온 듯하여 전화를 끊으려 했으나, 다시금 회장님의 함자를 언급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내 발걸음도 그대로 멈춰졌다. 먹먹함이 머릿속에서 가슴으로 전해질 무렵, 볼 수도 보이지도 않는 마음 역시 온몸에 전해졌다.


나는 멀어진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 편지를 썼었다. 문자든 전화든 답변을 받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장님은 문자도 전화도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 멀리서나마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나보다 더 큰 고마움을 표시해 주었다. 고마움은 크든 작든 또 다른 고마움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은 그게 누구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다. 내가 보고 마주한 매력적인 사람은 고마움이 무엇인지, 또 그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들의 고마움 때문에 그나마 고마움이 뭔지 알게 되었고, 이렇게 글이라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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