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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진 Oct 24. 2020

진심으로 다가간다

얼마 전, 내 생일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간,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와서는, 던지듯 말했다.

“어, 오늘 아빠 생일이네.”

아들은 태연한 척 말했지만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놀려볼 심상으로 물었다.

“선물 준비했어?”


아들은 선물은 없지만 그 대신 편지를 써주겠다고 했다. 아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나는 반신반의했다. 비대면 수업 때문에 한참 친구들과 게임에 빠져있는 요즘,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를 못 받는다 하더라도 서운함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아빠의 생일을 그 누구보다 빨리 축하해준 아들이 몹시 고마웠으니까.


생일은 토요일이었고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작업실에서 글을 썼다. 생일이었지만 전혀 생일답지 않은 그냥 일상적인 오후를 보낼 때 즈음, 시간 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절친에게 연락이 왔다. 사실 그날 저녁은 아들과 함께 중국집에서 먹을까 했는데, 작업실에 있을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친구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늦지 않게 치킨을 사 간다고 했다. 아들이 흔쾌히 양보를 했다.


사당동에서 친구를 만나 소주 한 잔 걸친 나는, 치킨을 사 가지고 집으로 갔다. 집사람과 딸아이는 외출을 한 상태였고, 아들 혼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손을 씻고서는 치킨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술을 마시면서 안주를 거의 안 먹었기에 나도 아들과 함께 치킨을 먹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아들과 하는 중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편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온 상태라 나는 따지듯 물었다.

“편지 썼어?”


막상 묻기는 했지만 살짝 걱정이 되었다. 당연히 못 썼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들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 봐, 내심 불편해서 말이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들은 ‘당연하지’하면서 자기 방으로 가서는 하얀색 A4용지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전날 밤 아들의 세심함에 놀라고,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에 또 한 번 놀랐다. 연필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 편지를 써본 사람이라면 편지를 쓰는 일이 얼마나 정성을 요하는지 잘 알 것이다.


나는 매년 생일 때마다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받는다. 아마도 6년 이상 되었지 싶다. 편지를 써달라고 강요를 한 적은 없다. 다만 나는 아들 생일에 그리고 딸 생일에 편지를 썼을 뿐이다. 편지를 통해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까? 그렇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 밤 아들 편지에 감동받았고, 다음 날 내 책상 위에 놓인 딸아이의 편지에 또 감동을 받았다. 어떤 말도 요구도 없었는데 알아서 편지를 써주었던 딸아이 또한 놀라움이었다.


내가 아들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까닭은 세심함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편지에 대한 얘기까지 말이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성을 요한다. 근데 이러한 정성을 요구하는 마음이 바로 세심함인 것이다. ‘세심하다’라는 말은 작은 일에도 빈틈이 없이 꼼꼼하다는 말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작은 일일 수도 있고 큰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빈틈없이 꼼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편지를 쓰는 일은 쉽지만 꽤 어려운 일이라는 소리이다. 편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기도 힘들지만 그 글을 쓰는 일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를 쉽게 쓰는 방법이 있다. 오로 진심과 진실을 담아 쓴다면 세상에서 가장 쓰기 쉬운 글이 된다. 진실된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을 이끌어낼 테니까 말이다. 그 생각은 따뜻하게 지면을 수놓을 것이고.


진실이 담긴 편지는 쓰는 사람과 편지를 받게 될 사람과 사이에 다리가 되어준다. 편지를 써보면 누구나 쉽게 다리를 느낄 수가 있다. 펜을 든 순간부터 그 다리가 서서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 생일에 아들과 딸이 몇 시에, 그리고 방인지 거실인지 어느 공간에서 편지를 썼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두 아이가 편지를 썼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얼마나 썼든 간에, 그 시간 집이 아니라 밖에 있는 아빠가 선명하게 그려졌을 것이란 사실이다.


매일매일 보지만 오로지 아빠만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던 그 순간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시간이다. 그래서 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 감흥과 감동이 클 수밖에 없다. 중학교 2학년 아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딸아이의 마음을 알았는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사춘기 아이의 마음을 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알 수 있을까? 정성이 담긴 글은 어쩔 수없이 진실을 끌어낸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편지를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짧든 길든 편지를 받아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또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글이나 편지를 자주 애용하면 된다. 매력적인 사람을 논하는 데 있어서 진심으로 빼고는 말이 안 된다. 편지는 오로지 진심만이 담기는 글이기에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내 아들이지만 그 아이가 멋지게 보이는 이유는 편지를 쓸 생각을 했다는 사실과 아빠에게 한 말에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또한 딸아이 예뻐 보였던 이유 역시 진심을 담아 정성스러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진심이 기반이 되어 매력이라는 옷을 입혀준 것이기 때문이다. 진심이라는 말이 거창한 말인가? 진실된 마음은 절대로 거창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매력이라는 거창한 모습을 만들어준다. 품은 마음은 소박할지라도 그 마음이 빛나는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누군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오로지 진심을 다해 다가가면 된다. 그 진심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 또한 용기를 내려한다. 거짓 없는 내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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