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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코너] 고등어 두 마리
고등어 두 마리를 구웠다. 한 마리를 세 식구가 먼저 공략했다. 주요 부위가 다 뜯겨 나간 뒤, 먹기 불편한 가장자리 부분이 남은 상황에서 남편의 젓가락은 다음 고등어로 곧장 향해서 두툼하게 살점을 뜯는다.
‘아이씨.. 왜? 아직 한 마리 다 안 끝났는데?’
‘이쪽에 남은 거 누가 먹으라는 거냐?’
기분이 나쁘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고 대체로 넘어가 주긴 했지만, 오늘따라 그냥 지나쳐주기 싫었다. 이쪽에 남은 것, 뼈랑 섞여 발라 먹기도 어렵고, 그야말로 아까워서 ‘처리’를 하여야 하는 부위, 내가 결국 처리하게 되는 사람이 되곤 했다. 물론 우리 착한 남편이 그런 건 여편네가 먹는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좀 느끼한 부위이기도 하고 먹기 어려워서 먹기를 포기한 것이겠지만, 그 이후의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거참,, 한두 번도 아니고.. 씁쓸하구먼.’
하지만 곱게 이야기했다. “우리 셋 모두, 한 마리가 모두 깨끗하게 사라지고 난 다음에 다음 것으로 가는 게 어때?” 듣는 태도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듣는 태도가 수용적이지 않고 불손하여 못마땅하다. 아니, 불손한 것이라기보다는 예기치 않은 나의 멘트에 마땅히 반응을 잘 해내지 못하는 눈치이다. 어쨌든 못마땅하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딸이야 내가 넘어가 주긴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인간 된 도리의 문제는 앞으로도 수시로 짚고 넘어갈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하여 ‘여남 프레임’에서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도리의 문제이다. 누구에게나 고등어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질진대, 먹기에 맛깔스럽지 않고 먹기 불편한 부위를 왜 ‘남겨’ 두는가? 그 부위는 도저히 자신은 먹을 수가 없어서 ‘우리 모두 먹지 않기로 하자.’라든지, ‘이 부분은 비릴 거 같아서 나는 못 먹겠는데, 미안해.’라든지 하는 말을 함께 했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자는 좋은 거 먹어야 하고 여자는 찌꺼기 먹으란 얘기냐.’라는 억울한 감정을 치고 나가 전투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런 감정이 치고 올라와서 쏴댄 적도 있다. 여성에 대한 굴레를 씌운 세상에 대한 ‘화’를 남편에게 포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당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을 리는 없다. 생사람 잡는 것으로 치부될까 봐 신경 쓰여서, 또는, 응당 지적되어 깨우쳐줘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피로감을 느낄까 봐, 마땅히 하여야 할 말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많은 나의 삶의 문제들이 여남 관계의 프레임 속에서 이야기되었고, 관련해서 가정 내에서 투쟁을 지금껏 해왔기에, 나 스스로 이 프레임 속에 있지 않은 이야기도 이 프레임으로 간주될까 봐 말하기 조심스럽게 되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부드럽게 다르게 이야기하여도, 어쩐지 이미 상대는 그 프레임에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거의 맞는 것 같기에 나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내 이야기의 구조는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저 고등어, 누구나 맛있게 먹고 싶은 그 고등어, 그 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나,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란 이런 것인 게다. 한숨 섞인 욕지거리 한 마디를 잘 들리지 않게 후.. 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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