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사이 들어갈 에피소드
제법 긴 시간 나를 괴롭혀온 문제가 있다.
딸아이의 빌어먹을 친구 몇 명은 정말 성가신 고민거리를 나와 딸에게 수시로 던진다.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인간관계에 대한 학습을 통한 성장이 있거나, 우정이 점점 쌓여가는 낭만적 추억을 안겨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결론지었다. '자라나는 새싹과 같은 아이'라고 여기며 아량으로 품어줄 수 있는 경우가 결코 아니다. 세상은 변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 온갖 미디어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각종 아이답지 않은 되바라진 행동양식을 취한다. 경쟁을 부추겨 공격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 그것이 자신이 온전하게 바로 서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런 세상에서, 상대를 배려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약자'의 모습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마구 내리 달리게 될 때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어른들의 세상에 원망을 포화하게 된다.
어쨌든 경우 없는, 넌덜머리 나는 짓거리를 하는 아이 친구들을 보며, 나는 때때로 분노의 감정까지 품게 되었고, 어떤 상대 아이에게는 '피해망상'이라는 결론까지 지을 지경으로 '처리'하기에 이르렀던 바도 있다.
관련된 문제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에, 소중한 나의 사색의 시간에 그 문제가 자꾸 침범하기 일쑤다. 그러다 한 번은 아이가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엄마인 내가 우리 아이를 보호하거나 상대를 응징하기 위한 일종의 '지랄'을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이 이르렀다. '지랄'을 하는 것은 너무 큰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나의 decency('품위'라는 국어로 썼을 때 충분한 의미로 와닿지 않아 불가피하게 영어를 사용함)가 찌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싫기 때문에 보통 하지 않기를 택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문제일 경우에는 아주 쉽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 문제가 결부되었을 때는, '내가 '지랄'하지 않음이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자책이 들 때가 있다. 아이와 아이 친구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보통 '자신의 잘못을 먼저 되돌아보라.'는 원칙에 따라 아이 잘못을 먼저 짚었고, 아이들 간의 단순 다툼이 아니라 상대 아이의 막무가내식의 횡포를 우리 아이가 당할 때, 그 아이 엄마에게 뭐라도 이야기하여야 할 것 같았지만 내 decency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들 간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나의 소극적 태도를 합리화하곤 했다.
이 생각에 이르고는,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의 일부 내용이 도움이 되어 다른 영역으로 사고를 옮길 수 있었다. '지랄'의 상태에 생각을 뺏기지 않고, '지랄'하기를 선택하는 '나'라는 '주체'에 집중하면 어떨까? 나는 '지랄하기'를 선택하였고, 그 선택 밑에는 뚜렷한 명분 또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렇게 선택하였을 때 나는 '지랄'의 광기에 매몰되지 않고 '지랄'이라는 방법을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 '지랄'의 결과까지 책임질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랄'이 필요할 때 바로 '선택'할 수 있기 위해, 나의 '존엄'이 이따위 '지랄'로서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러므로 나의 '존엄'을 단단하게 채워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이해는, 내가 하기로 하는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내재적인 기준들을 분명히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끝까지 놓지 않고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주체로서 선택하여 나의 존엄성을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