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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F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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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Mar 13. 2022

함께 한 기억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하다

조셉 코신스키: 오블리비언(Oblivion)

오블리비언(Oblivion, 조셉 코신스키 감독, 톰 크루즈, 올가 쿠릴렌코, 모건 프리먼 주연, 2013)



∙ 복제인간 연작 1 : 영원을 꿈꾸는 복제 (6번째 날)

∙ 복제인간 연작 2 : 우린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다 (더 문)



    앞에서 영화 <6번째 날>을 소개하면서 복제인간 시리즈로 세 편의 영화를 다루기로 한 바 있다. 그리고 영화 <더 문>을 소개했고 이제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영화 <오블리비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 <오블리비언>은 2077년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물로서 앞서 소개한 두 편의 복제인간 연작 <6번째 날>이나 <더 문>과 마찬가지로 복제인간의 문제를 건드린다. 복제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앞의 두 영화와 구도는 비슷할 수 있지만 정체성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 길은 영화의 제목부터 생경한 단어를 불러오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단어 자체부터가 영화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생경한 제목 "오블리비언(Oblivion)"은 사전적 의미로 '망각'을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나 죽음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오블리비언은 망각이다. 영화는 이렇게 망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반대로 영화의 내용은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한 신체가 경험하지 못한, 하지만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어떤 기억을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앞서의 두 연작과는 다르게 기억으로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길을 간다. 간단히 말해서 기억이 있는 한 당신은 당신인 것이다.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 잊어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지난 꿈 스쳐간 여인이여
  이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바로 그 모습
  떠오르는 모습 잊었었던 사람 어느 해 만났던 여인이여


   조덕배가 부른 <꿈에>라는 노래 가사처럼,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 분)는 어떤 여인에 대한 반복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한 여자를 기다린다. 저 멀리서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그를 응시하며 서 있다. 오가는 인파들로 인해 그녀의 모습이 지워졌다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던 중 잭은 잠에서 깬다. 이렇게 영화는 흑백 화면으로 그려지는 아련한 잭의 꿈으로 시작한다. 잭은 그녀를 알 것만 같지만 만난 적도 없고 늘 함께 했지만 이름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그는 "기억"이라 부르고 싶지만 자신의 기억일 리가 없다. 그렇다, 잭은 그것이 꿈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만 같다. 5년 전, 안전 요원 보안 서약을 하고 강제 기억 삭제 처방을 받았음에도 이 꿈은 마치 자신의 실제 기억인 듯 생생하다.




   잭이 사는 시대는 2077년, 50년 전 지구는 '약탈자'라 불리는 외계인들에게 침공을 당했다. 약탈자들은 지구 침공 전에 먼저 달을 반토막 내버렸다. 그 결과, 인력이라는 균형이 깨져버린 지구에는 지진과 쓰나미를 동반한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땅이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어서 침공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지구는 핵무기를 사용했다. 덕분에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는 있었지만 핵을 사용한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구는 방사능으로 폐허가 되어 버렸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토성의 두 번째 위성인 '타이탄'이 이주지로 결정되었고 이주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이주를 완료했으며 미처 떠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 역시 타이탄으로 가기 위해 '테트'라 불리는 임시 우주 정거장에 잠시 기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관리를 위한 테트 요원들 외에는 없다. 지구 관리와 이주 통제는 물론 테트에서 담당했지만 테트를 유지하기 위하여 땅이나 바다 위에 설치된 관련 설비들은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단지 소수의 요원들만이 지구로 파견되어 이 업무를 수행한다.


   잭 역시 파견 요원으로, 바닷물을 에너지로 바꾸어 테트에 공급하는 설비 관리 임무를 띠고 동료이자 연인인 빅토리아(이하 비카,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와 함께 지구로 파견 나와 있다. 그의 공식 직책은 기술 요원 49이며 비카는 통신 담당원으로서 잭을 관리하고 잭은 설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감시하는 드론도 같이 관리한다. 이제 2주 후면 둘은 임무를 마치고 테트 본대로 합류할 것이다. 물론 지구에는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지구를 침공했던 소수의 약탈자들도 잔존해 있다. 전쟁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잔존병들은 지상에 숨어서 끊임없는 게릴라 전술로 설비를 파괴하고 드론과 잭을 공격한다. 그래서 잭과 비카의 거주 공간은 구름 너머 바벨탑처럼 하늘 높이 세워진 첨탑의 꼭대기에 있다. 또한 약탈자 색출 및 처치를 담당하는 막강한 살상용 드론들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 만약 드론이 고장 나거나 설비 점검이 필요한 경우, 또는 이상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잭이 직접 비행선을 타고 출동한다. 비카는 언제나 거주지에 남아서 테트와 통신하며 정보나 지시를 받아 잭에게 전달한다.


   매일 아침이면 옷장 앞에서 작업복으로 환복하는 잭, 비카와 다정하게 찍었던 옷장 위의 빛바랜 흑백 사진이 언제나 그를 반긴다. 테트 본부에서는 둘의 팀워크가 완벽하다고 칭찬이 자자했지만, 요즘의 잭은 계속되는 꿈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해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는 팀워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카는?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완벽하게 임무를 마치고 하루라도 빨리 지구를 떠나고 싶을 따름이다. 반면에 잭은 왠지 알 수는 없지만 지구가 자신이 살아야 할 터전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이제는 습관처럼 떠안은 채 잭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설비 관리를 위해 일찍이 비행선에 올랐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해진 시각에 테트와 통신이 연결되면 모니터에는 테트 감독관 샐리의 얼굴이 보이고 둘의 팀워크에 대한 질문과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는 비카의 대답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샐리로부터 드론에 문제가 생겼다는 통지를 받고 잭은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고장 난 드론은 싱크 홀에 빠졌기에 잭은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오토바이에 케이블을 매달아 아래로 내려갔다. 폐허가 된 그곳은 전쟁 전에는 도서관이었던 걸로 보인다. 고장 난 드론을 발견했고 수리를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면 어련히 적의 출몰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며, 역시 약탈자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수적 열세로 인해 잭은 위기에 처했으나 마침 수리한 드론이 적들을 대신 궤멸시켜 주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잭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곳에 매복했던 약탈자들의 목적이 자신의 제거가 아니라 생포였던 것 같다는 느낌... 잭은 그곳에서 세월에 빛바랜 책 한 권을 주워 들었다. 호레이쇼라는 제목이 적힌 책, 무심하게 그 책을 바라보다 그는 그것을 챙겨 들었다.


   그날 밤, 잭은 꿈속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순간 꿈에서 깼을 때 엄청난 굉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약탈자들이 설비를 폭파한 것으로 보인다.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 바다 위의 거대한 수력 설비 한 기가 무너지고 있었다. 최근 약탈자들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드론의 배터리를 탈취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들은 탈취한 배터리를 이용해서 설비를 폭파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체불명의 음성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고 잭은 신호의 발신지로 향했다. 비카가 찍어준 신호 발신지에 다다랐을 때 잭은 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바로 꿈에서 본, 하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사주경계를 펼치며 소리를 따라 빌딩으로 들어서서 전망대 쪽으로 올랐다. 반쯤은 무너져 내린 담장에 위치한 전망대의 망원경이 보였다. 전망대와 망원경... 순간 꿈속의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 역시 꿈에 나왔던, 하지만 폐허가 되기 전의 장소다. 전망대 사무실 안쪽에서 발신 장치를 찾을 수 있었다. 약탈자들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빌딩의 안테나를 이용해서 지구 바깥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신호 판독 결과 그것은 '그리드 17'이라는 지역의 좌표였다. 하지만 비카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타워로 돌아오는 길에 잭은 일탈을 감행한다. 비카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사능 오염 지역의 경계를 아슬하게 경유하여 협곡으로 비행선을 몰았다. 그에게는 비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푸른 숲을 뒤로하고 바로 앞으로는 호수를 둔 낡은 오두막 한 채가 있는 공간이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것 치고는 그곳의 자연 생태계는 꽤나 잘 보전되어 있다. 그곳 오두막에서 잭은 여기저기서 수집한 잡동사니들을 진열한다. 그곳에는, 맙소사~ CD도 아니고 LP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잭은 폐허가 된 도서관에서 주웠던 그 책을 낡은 책장 위에 진열했다. 전축 위에 LP판 하나를 틀었다. 프로콜 하럼(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이 흘러나온다. 바깥으로 나와 맑은 호숫물을 마신 뒤 숲이 만들어주는 적당한 그늘과 햇살을 받으며 잔디 위에 누웠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든 잭, 다시 그녀의 꿈을 꾼다. 이날 수색을 나갔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그 전망대다. 이번에는 그녀와 함께 그곳에 있다. 망원경으로 시내의 풍광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른다, 잭...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깼다. 잠깐 잠든 것 같은데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반복되는 꿈, 꿈속의 그녀, 혼란스럽다... 그 순간 멀리서 또 폭발음이 들려왔다.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우주선 하나가 추락하면서 몸체가 분리되었고 낙하산이 펼쳐진다. 잭은 비행체가 떨어진 곳으로 급하게 비행선을 몰았다. 비카에게 위치를 확인했을 때 비행선이 떨어진 곳은 의문의 음성 발신기가 지정한 지역 '그리드 17'이었다. 테트와의 연결이 곧 끊기기 때문에 안전을 위하여 추락한 비행체 처리는 드론에게 맡기고 요원은 철수하라는 테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장 확인을 핑계 삼아 잭은 그곳으로 날아갔다. 추락으로 인해 비행체는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로 확인했을 때 '오딧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 비행체는 아주 오래된, 심지어 침공 이전의 구형 비행체였다. 귀환하라는 비카의 명령에도 잭은 현장에 착륙해서 수색 작업을 개시했다. 박살난 비행체는 비행 탈출용 수면 캡슐들을 지구로 귀환시키는 운송 수단이었고 캡슐 속에는 잭과 같은 인간들이 동면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동면 상태에 있는 다섯 명의 생존자를 찾았다고 타워에 보고한 후 잭은 계속 수색을 이어갔다. 형채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비행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J. 루사코바"라는 이름이 새겨진 또 하나의 캡슐을 발견했다. 캡슐 유리의 흙먼지를 손으로 지웠을 때, 잭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캡슐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의문의 여인이었다. 순간 드론들이 다가왔고 살상용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캡슐 속의 생존자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잭이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테트와의 연결이 끊겼기 때문에 비카 쪽에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꿈속의 여인뿐... 당연히 잭에게는 그녀를 살려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드론이 그녀의 캡슐에 총구를 겨눴을 때 잭이 막아섰고 다행히도 드론은 잭을 인식하고는 물러났다. 잭은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의 캡슐을 비행선에 싣고 타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상황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수면 캡슐을 열었을 때, 꿈속의 여인이 액체 산소를 내뱉으며 깨어났다. 잭을 본 그녀는 놀랍게도 힘없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 '잭'을 부른다, 마치 잭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러곤 다시 기절해버렸다. 잠시 후 깨어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줄리아(올가 쿠릴렌코 분)라고 했다. 잭은 비행선이 추락했고 그녀는 자신이 구했지만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일러줬다. 줄리아는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비카가 말했다,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델타 수면 상태에 있었어요. 얼마나요? 잭이 답했다, 60년이요, 최소한...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줄리아는 갑자기 비행선으로 가야 한다며 비틀거리며 일어났지만 비카가 진정제를 주사해서 그녀를 진정시켰다. 줄리아가 탄 비행선을 대기권으로 진입시킨 것은 약탈꾼 잔당들이 쏜 신호였다. 여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지 물었지만 의문의 여인은 답이 없다. 어떤 임무였는지에 대한 질문에도 그저 기밀이라고 할 뿐, 우주선의 블랙박스를 찾기 전까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줄리아가 잠든 60년 동안의 사정을 잭이 설명하는 동안 비카가 가만히 잭의 손을 잡았다. 이를 본 줄리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할 뿐이다. 그 웃음은 남자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전형적인 쓴웃음이었다. 줄리아가 잠자리로 갔을 때 비카와 잭은 줄리아 처리 문제로 논의를 했다. 비카는 아침이 오면 테트로 보내자고 했지만 잭은 그동안 참아왔던 질문을 진지하게 던진다. 비카, 이 임무 맡기 전의 기억... 남아 있어? 기억 삭제 이전의... 냉철한 비카의 대답,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우리 임무야, 잊었어?


   다음 날 아침, 여명을 받으며 줄리아가 서 있다. 잭이 다가갔다.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는지 줄리아가 물었다. 테트와 통신이 연결되면 그녀의 일을 비카가 보고할 것이고 그러면 테트에서 그녀를 데려갈 거라고 말해줬다. 그녀는 부탁했다, 블랙박스를 찾아야 한다고, 그래서 추락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잭도 알고 싶었다. 비행선이 출발하는 소리에 놀라 비카는 잠에서 깼다. 잭과 통신을 연결했을 때 블랙박스 함께 찾으러 간다는 답이 돌아온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는 비카, 난 당신을 못 지켜줘... 그래, 이해해, 내가 알아서 할게... 잭은 통신을 끊어 버린다. 추락 현장에서 단서를 찾는 잭과 줄리아, 그때 약탈자들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비카가 그 사실을 알려주려 했지만 잭이 통신을 끊었기에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줄리아가 블랙박스를 찾았다. 그 순간 멀리서 약탈자들의 모습이 보였고, 동시에 수색 장소에 매복해 있던 한 약탈자의 타격에 잭은 쓰러졌고 줄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이 상황을 타워에서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카는 어쩔 줄 몰라한다. 잭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리모컨으로 비행선을 타워 자동 귀환 모드로 돌렸다. 하지만 다가온 약탈자의 추가 타격에 완전히 기절하고 만다. 비카는 잭이 사라진 '그리드 17' 지역으로 드론을 보내 줄 것을 테트에 요청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잭은 자신이 결박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주웠던 책의 문구를 누군가 읊조리고 있었다. 순간 성냥불이 켜지고 입에 시가를 문, 약탈자가 아니라,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지도자 격으로 보이는 그(모건 프리먼 분)는 오랫동안 잭을 지켜봐 왔다고 한다. 보안을 위해 기억을 다 삭제했기에 자신은 털어놓을 아무것도 없다는 잭의 말에 약탈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나? 그 사내의 첫 질문이었다. 방사능 지역엔 접근 마라, 너무 많은 걸 묻지 마라, 업무 주의사항치곤 좀 특이하지 않나? 그러곤 그가 '조명!'이라고 소리치자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잭이 본 것은 폐허가 된 건물 층층이 늘어선 수많은... 약탈자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우린 외계인이 아니야, 인간들이야.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드론의 감시를 피해 숨어 살았고 약탈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이들은 GPS 코드를 뚫었고 그것을 이용해 오디세이호를 추락시켰다. 왜? 오디세이는 NASA가 만든 정밀 원자로라고 한다. 연료 전지 한 개가 그 거대한 수력 설비를 박살 내 버렸다. 그런 게 10개라면 어떨지 상상해 보게... 무기급 플로토늄 핵도 장착했고 그것을 운반할 드론도 탈취했지만 문제는 드론이 자신들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작동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잭이 필요한 거다. 드론이 핵을 운반할 수 있도록 재프로그래밍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잭을 생포한 이유다. 그러면 어디로? 바로 테트다. 그들은 핵폭탄으로 테트를 폭파시켜 이 기나긴 전쟁을 끝장낼 것이라 한다. 테트에도 사람들이 있어, 이런 잭의 반론에 그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테트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드론을 재프로그래밍하라며 잭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엿이나 먹어... 잭에게 협박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총구는 줄리아의 머리를 향한다. 그때 비밀 기지 부근에 드론이 출현했다는 비상 신호가 떴고 다른 이들이 다급하게 전투 준비에 들어간 사이 남자는 잭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가는 동안 잭은 그들을 설득했다, 드론 하나가 왔다는 것은 또 다른 드론들이 더 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이곳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자신과 줄리아를 보내주면 공격을 중지시키겠다고 했다. 우두머리는 아무 말도 없이 잭과 줄리아를 데리고 미로 같은 길을 지나서 문을 열었고 잭과 줄리아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덧붙였다. 나, 거기 가봤네, 소위 방사능 구역... 진실이 궁금하다면 자네도 한번 가보게.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빼앗았던 잭의 총을 돌려준다.


   잭과 줄리아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다시 돌아왔다. 잭은 우선 모스 부호를 통해서 자신의 생존 사실을 비카에게 알렸다. 비카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드론을 원위치시켰고는 타워의 비행선을 잭이 있는 곳으로 출발시켰다. 비카에게 보고를 끝낸 잭이 돌아섰을 때 꿈속에서처럼 줄리아가 전망대의 망원경 앞에 서 있다. 잭은 혼란스럽다, 당신 누구야, 내게 뭘 감추고 있지? 오디세이 호의 임무가 뭐였어? 오디세이 호의 원래 목적은 타이탄 탐사 비행이었고 그것이 줄리아가 승무원이 되어 맡은 최초의 임무라고 했다. 하지만 출발 6주 전에 외계 물체를 감지했고 자신들이 그곳으로 급파되었다고 한다. 모두 동면에 들어간 상태에서 오디세이 호가 외계 물체에 접근했을 때 NASA 통제실에서... 놀랍게도 잭 자신과 비카를 먼저 깨웠다고 했다. 믿기지 않는다, 60년 전에 자신과 비카가 오디세이 호에 있었다니...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외계 물체가 바로 '테트'였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를 반복하던 잭은 기어이 소리친다, 넌 누구야? 그렁거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의 눈을 응시하며 줄리아가 조용히 대답한다, 난... 당신 아내야... 말문이 막히는 ... 그녀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잭은 진짜 잭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린 여기 왔었어... 그날 만나자고 하더니 세상의 꼭대기로 날 데려왔지, 바로 여기로 말이야... 망원경을 가리키며 줄리아가 말을 이었다, 여길 들여다봐, 당신이 말했지, 그럼 내가 미래를 보여줄게. 이제는 잭도 이해한 듯하다, 꿈속의 장면 그대로다... 이번엔 잭이 말한다, 그리곤 반지를 꺼냈지... 줄리아는 자신이 메고 있던 목걸이에 달린 반지를 말없이 보여 준다. 그 반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잭: 당신은 말했어... 줄리아: 좋아... 처음엔 흑백이었던 그 꿈은 조금씩 세피아톤으로 바뀌면서 점차 자신의 색깔을 찾아간다. 이제야 의 꿈은 명확해진다. 그건 꿈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줄리아가 들여다보던 망원경 너머로 뭔가 반짝였다. 그녀가 망원경에서 눈을 뗐을 때 잭은 반지를 내밀었다. 줄리아는 감격해서 잭을 껴안았다. 60년 전의 그 장소에서 그때처, 지금 둘은 재회의 포옹을 하고 있다. 하지만 비카가 보낸 비행선이 어느새 도착해서 그 장면을 그대로 비카에게 전송하고 있다.

 

   타워의 비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비행선을 타워 쪽으로 돌리며 잭은 테트에 보고하지 말라고 비카에게 요청했다. 타워에 도착했을 때 문은 잠겼고 비카는 열어주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마, 아무 말도 듣기 싫어... 위험하니까 함께 떠나자는 잭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늘 저 여자뿐이었지? 잭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줄리아는 내 아내야... 비카는 아무 말 없이 패널의 버튼을 눌렀고 테트에 보고를 시작했다, 저의 요원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가 찾은 생존자가 그를 무능하게 만들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둘의 팀워크는 아직도 좋은가? 계속되는 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카는 이번에는 평소와 전혀 다르게 답했다, 아뇨! 순간 비카가 잠갔던 타워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비카는 놀라서 물러섰다. 곧이어 타워 아래쪽에 숨겨져 있던 대형 드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기를 직감한 잭이 함께 도망가자고 달랬지만 비카는 끝까지 거부한다, 난 타이탄으로 갈 거야... 타이탄은 없어, 우릴 속인 거야... 가까이 오지 마... 비카,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난 알고 싶지 않아! 비카가 돌아섰을 때 대형 드론이 비카를 막아선다. 비카가 고개를 돌려 잭을 불렀을 때 캐논 건이 발사되었고 비카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 대형 드론은 두 요원의 팀워크가 어긋났을 때 모두를 폐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타워에 몰래 숨겨진 살상용 무기였다. 드론이 조금씩  쪽으로 다가온다. 드론의 눈에는 이제 잭은 폐기 타깃으로 표시된다. 드론이 캐논 건을 잭에게 겨누던 순간 줄리아가 비행선의 캐논 건으로 드론을 쏘아 고꾸라트렸다. 테트의 샐리는 비카의 죽음을 별일 아닌 것처럼 드론의 오류로 치부한다. 그리고 줄리아와 함께 테트로 돌아오면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겠다고 한다. 이젠 더 이상 속을 잭이 아니다. 줄리아와 함께 비행선을 몰아 그곳을 떠났지만 드론들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제 멋진 공중 전투씬이 이어지고 잭은 아슬아슬하게 드론들을 물리치지만 마지막 드론이 비행선에 충돌하면서 추락 직전에 비상 탈출을 감행하여 둘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추락한 비행선을 찾으러 갔을 때 자신이 몰던 비행선과 똑같은 비행선이 추락한 비행선 옆에 착륙한다. 비카와 자신이 지상의 유일한 임무 수행자로 알고 있었지만 그와 똑같은 옷을 입고 비행선에서 내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소리를 치며 그에게 달려갔을 때 놀란 조종사는 에게 총을 겨누었다.  역시 총을 겨누며 서로 대치 상태로 돌입한다. 하지만 쌍방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다른 그 역시 잭이었다. 그때 줄리아가 잭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고 둘 다 동시에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줄리아 역시 한 쌍의 쌍둥이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순간 또 다른  역시 그녀를 봤을 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꿈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그가 줄리아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동안 잭이 재빨리 또 다른 자신을 공격했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던 차에 발사된 총이 줄리아의 배를 맞춰 버린다. 힘겨운 사투 끝에 그는 다른 잭을 기절시키고 줄리아에게 달려갔다. 쓰러져 있는 그녀를 안아 바위 아래에 뉘인 후 다른 잭이 몰고 온 비행선으로 갔다. 그 비행선은 52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비행선에 올라 52구역 타워로의 귀환을 명령했다. 비행선은 당연히 잭을 잭으로 인식할 뿐이다. 52구역 타워 역시 높은 산 정상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서 급하게 의료 장비를 챙겼을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카가 그를 반긴다. 잭은 그녀에게 같이 떠나자고 했지만 이전의 비카처럼 그녀 역시 규정에 충실하다. 다시 줄리아에게 돌아온 잭은 역시 미래 사회에 어울릴 휴대 의료 장치로 그녀를 치료한다.


   줄리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잭의 비밀 장소인 전원의 오두막에 누워 있다. 잭이 수집해 진열해 두었던 앤티크들을 보며 미소 짓는 줄리아, 바깥에는 호수를 바라보며 잭이 서 있다. 이제 잭은 상황을 명확히 인지한 듯하다. 60년 전의 잭, 줄리아의 남편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60년 전의 남편의 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한 남편의 클론들이 지구 상에 현재 자신 말고도 나뉜 구역에 따라 그 수만큼 존재한다는 것을...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을 틀고서는 줄리아가 그에게 다가간다. 당신은 늘 이 노래를 좋아했었지... 잭이 대답한다, 난 그가 아니야... 난 알아,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내 기억이 미치는 한... 이렇게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네. 줄리아가 미소를 머금으며 답한다, 내게 했던 말 기억나? 모든 게 끝나면 호숫가에 집을 지어준댔지, 그 집에서 함께 살찌며 늙어가자고, 싸우기도 하며 술고래가 되어 가면서... 그러다 어느 날 죽어서 호숫가 언덕에 묻히면 세상은 우릴 잊겠지만 우린 늘 함께 있을 거랬지... 잭의 말, 기억나... 이 말을 줄리아가 바로 받아서 말한다, 그 기억은 당신 거야, 우리 거라고... 그 기억이 바로 당신이야! 그렇게 둘은 뜨거운 키스를 했고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했다, 잭의 말대로 로맨틱하게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줄리아가 눈을 떴을 때 잭은 무기를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가야만 해... 줄리아는 둘이서 그냥 이곳에 함께 머물고자 했지만 잭은 그들을 도와야 한단다. 모든 게 마무리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자고 약속을 했고 그렇게 둘은 약탈자로 알려진 그 일당들을 찾아간다. 그들의 지도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둘을 맞이했고 자신을 '말콤 비치'라고 소개했다. 잭은 그들이 탈취한 드론 앞에 서서 그들의 요구대로 프로그램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말콤은 지금의 잭은 기억할 수 없고 줄리아는 우주에서 잠들어 있어 알 수 없었던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말콤이 입대한 지 1년 만에 테트가 나타났다. 그는 달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도 봤다, 그 뒤 자연재해라는 대재앙이 뒤따랐다지만, 다행히도 시카고는 암반 덕에 최악의 해일과 지진을 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굶주려 갈 즈음에 테트의 함대가 지구에 착륙했다. 함대의 문이 열리고 잭이 내렸단다, 하지만... 우주 탐사 대장이자 지구의 영웅인 그 잭이 아니라 수천 명이 잭들이, 그것도 기억이 지워진 채 영혼도 인간성도 없는 살인 병기가 되어서, 인류의 적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테트의 정체는?  수 없는, 그저 익명의 그것이다. 영화는 테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개연성을 살린다. 무엇이라 정의하는 대신 그저 우주를  떠돌며 행성들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그런 미지의 존재로 묘사한다.


   마침내 잭이 드론의 재프로그래밍을 마무리했다. 이제 이 드론은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배터리 폭탄을 싣고 적의 심장부로 향할, 지구의 운명을 책임질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테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저항군의 거처로 여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출격시켰다. 이제 드론과 저항군의 전면전이 시작된다. 막강한 드론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했고 기어이 물리쳤지만 아군의 인적, 물적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지도자인 말콤도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마지막 희망, 테트를 파괴할 목적으로 재프로그래밍된 드론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말콤의 실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생존자 모두가 낙담하는 순간이었다. 잭은 자신의 비행선으로 자신이 직접 폭탄을 싣고 테트로 가겠다고 했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가루가 될 것이라는 말콤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제가 함께 가면 다르죠... 줄리아가 나섰다. 테트는 줄리아를 원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히 잭은 반대했지만 줄리아는 이미 결심이 섰다. 이제 줄리아는 핵폭탄을 실은 수면 캡슐에 다시 누웠다. 줄리아; 사랑해, 잭; 우리 꿈꿔... 이제는 테트로 향하는 자살폭탄이 된 둘, 그렇게 안타까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줄리아는 잠이 든다.


   줄리아가 잠든 캡슐을 비행선에 싣고 이제 잭은 테트로 향한다. 가는 도중 오디세이 호의 마지막을 담은 블랙박스를 튼다. 잭과 비카는 테트 조사 임무를 위해 테트로 향하고 있다. 아내 줄리아를 비롯한 나머지 승무원들은 아직 수면 캡슐에서 잠들어 있다. 테트에 어느 정도 근접했기에 NASA 통제실에서는 함장인 잭과 부함장인 비카를 먼저 깨웠다. 통제실과 통신이 연결되었을 때 통제실 책임자인 샐리의 정겨운 인사말이 들려온다. 외계 물체와의 최초 접촉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앞서 비카는 기념이라며 잭과 다정한 셀카를 찍었다. 그 셀카는 매일 환복할 때마다 잭을 반기던, 60년 후의 그 빛바랜 사진이 된다. 샐리의 통제에 따라 점차 테트로 다가갔을 때 갑자기 테트가 오디세이 호를 강하게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 인력은 오디세이 호가 거역할 수 없을 힘이었고, 계속 후진을 시도했으나 더욱더 빠르게 테트로 끌려갈 뿐이다. 이제는 지구와의 교신마저 끊겨 버렸고 잭은 비상 상황임을 깨달았다. 잠들어 있는 승무원들이라도 탈출시키기로 했고 비카에게도 수면 캡슐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지만 비카는 자신은 부함장이라며 끝까지 남겠다고 명령을 거부했다. 잭이 수면 캡슐을 실은 비상 탈출선을 분리시키기 위해 캡슐 룸으로 왔다. 캡슐에서 잠들어 있는 아내 줄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우리 꿈꿔'라는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탈출선을 사출했을 때 줄리아를 실은 탈출선은 다행히 뒤로 떨어져 나갔지만 오디세이 호 본체는 더 빠른 속도로 테트로 빨려 들어갔다. 잭과 비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엄청나게 밝은, 새하얀 빛뿐이었다. 그리고 블랙박스의 녹음도 거기까지였다.


   쥴리아의 캡슐을 실은 비행선이 테트에 가까워지자 샐리의 음성이 들려온다. 잭은 줄리아와 함께라고 했고 테트의 문이 열렸다. 테트 내부는 거대한 텅 빈 공간이다. 곧바로 두 대의 드론이 잭에게 다가온다. 잭의 신체 바이오리듬 변화를 감지한 샐리, 아니 테트는 잭이 뭔가 숨겨진 의도를 품고 왔음을 눈치채고 사실대로 실토할 것을 협박한다. 잭은 자신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인류의 생존을 원한다고... 마침내 테트 코어의 문이 열렸다. 거대한 코어 내부의 벽면에는 레디-메이드 된 수천의 잭과 비카들이 벌집 같은 유리상자 안에 잠들어 있다. 코어 중심에 비행선을 착륙시키고 줄리아의 캡슐을 내렸다. 테트는 끊임없이 잭과 줄리아의 장밋빛 미래를 노래했지만 그것은 비카가 줄리아로 바뀔 뿐인 뻔한 복제의 반복일 터다. 잭은 미소를 띠며 캡슐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캡슐에서 몸을 일으킨 이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말콤이었다. 그 시각, 잭의 비밀 오두막 앞에는 또 다른 수면 캡슐이 하나 놓여 있다. 곧 캡슐이 열리고 줄리아가 잠에서 깨어난다. 그녀가 캡슐에서 발견한 것은 배터리 폭탄 대신에 마지막 순간에 그와 함께 봤던 그림이었다. 저 멀리 테트에선 잭과 말콤이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그들의 손에는 스위치가 쥐어져 있다. 둘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스위치를 눌렀다. 지상에서는 언제나 하늘 높이 은빛으로 빛나던 거대한 삼각형의 형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테트가 파괴되고 3년이 흘렀다. 줄리아는 잭과 마지막 밤을 보낸 그 오두막을 지키며 여전히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잭의 딸과 함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왔다. 일단의 사람들 속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여전히 테트의 작업복을 입고 있는 그의 가슴팍엔 49가 아니라 52이란 숫자가 박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52번 잭의 독백; 그가 지은 집을 3년 동안 찾아다녔다, 어딘가에 있음을 알기에... 난 그를 안다, 나는 곧 그다. 난 잭 하퍼다, 난 이제, 집에 왔다...





   여기까지가 영화 <오블리비언>에 대한 줄거리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든, 아니면 행간의 의미든 따지지 않더라도, 굳이 뭐라도 건져내고자 하는 노력 없이 그냥 영화 그 자체로 가볍게 보더라도 이 영화는 재미있다. 비록 크게 흥행은 못했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 준수한 SF적 영상미와 괜찮은 사운드 트랙을 갖추고 있는 수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록 어떤 심오한 이야기에 깊이 천착하고자 하는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닐 지라도 연작의 주제인 "복제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면 앞서 소개했던 두 편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복제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앞서 소개했던 <6번째 날>과 <더 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클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두 동일 인물이 서로 대면하는 구조는 앞서의 두 영화와 비슷하지만 대면의 구성에는 차이가 있다. <6번째 날>에서는 원본과 클론이 직접 대면하게 되면서 서로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사실 <6번째 날>은 버디 무비 형식을 띠는데 이때 콤비로 활약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두 주인공은 바로 원본과 클론이다. 이렇게 버디 무비라고 할 수 있는 전제는 결국 원본과 클론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상호 인정일 것이다. <더 문>의 경우 <6번째 날>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동일 인물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 둘은 원본과 클론으로 구성된 <6번째 날>과 다르게 원본의 존재와는 상관없는 클론 vs 클론으로 구성된다. 원본의 부재 속에서 두 클론은 정체성의 문제로 극한의 대립까지 치닫지만 이 대립을 넘어선 두 클론은 결국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이타적 행위에까지 다다른다. 더 나아가서 영화는 이러한 이타성으로 이어지게 하는 또 다른 조력자로서 AI를 내세우는데 종국에는 이 AI마저 이타성을 담지한 존재로 그리면서 인간 정의의 범위를 확대시킨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두 동일 인물의 갈등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정체성의 문제를 종국에는 자연스럽게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로 귀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두 영화 모두 정체성의 문제에 있어서 두 명의 동일 인물의 원본 욕망에 따른 갈등을 거쳐 종국에는 원본과 무관하게 서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오블리비언>은 앞서 두 작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의 문제를 건드린다. <오블리비언>의 경우 <더 문>과 마찬가지로 원본의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인 클론만이 존재하고 클론 사이의 갈등도 존재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사실 동일한 두 클론이라고 하지만 영화의 전개에 있어서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오블리비언>은 정체성이라는 던져진 화두를 회수하기 위하여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일까? 앞서의 두 영화와는 다르게 영화는 바로 '기억'의 문제에 천착한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오블리비언'의 사전적 의미는 망각을 의미하며 이 망각은 원본의 기억이 삭제된 클론을 정의한다. 여기의 클론은 원본도 사라졌고 원본의 기억마저도 제거된 클론이다. 즉, 망각이 클론의 존재를 근거 짓고 있는데 이는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의 가능성마저 지워버린 망각이 될 것이다. 따라서 테트가 정의하는 망각은 기억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바로 정체성의 상실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성립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의 정체성을 근거 짓는 것이 기억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망각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기억을 통해서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이는 곧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며 여기에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그대로 녹아 있다. 이 동일성은 바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을 것이며 따라서 내일의 나도 동일한 나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여러분들이 자신을 자신으로 정립케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거창하게 본유관념이니 본질이니 또는 자의식이니 하는 철학적 개념들을 가져올 필요도 없이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써 여러분들이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일 것이다. 오늘의 나와 비교했을 때 동일한 어제의 나는 바로 내가 기억하는 어제의 나다. 오늘의 나를 나는 기억할 것이기에 변하지 않을 내일의 나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고유한 나라는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직관적인 동시에 경험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당장 기억 상실증을 떠올려 본다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관점에서 기억을 다루는 영화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브런치 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죽음)>에서는 리플리컨트 식별을 위해 레이첼이 가진 기억의 진위 여부를 매우 정밀하게 검사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이는 바로 기억이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가르는 기준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내는 또 다른 SF 수작 <다크 시티(알렉스 프로야스 감독, 루퍼스 스웰, 윌리엄 허트 주연, 1998)>를 예로 들 수도 있다. <다크 시티>에서는 외계인이 사람들에게 매일 새로운 기억을 심어 하루하루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데 이 경우 모든 사람들은 매일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써의 기억이라고 말할 때, 영화 <공각기동대(브런치 글: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인조영혼)>는 정보로서의 기억과 그것이 외재화 가능한 세상이 되었을 때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억의 상실은 바로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앞서 예를 든 것처럼 기억 상실증 환자라면 즉각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을 매일매일 하게 될 것이다. 기억의 상실이 바로 오블리비언이다. 영화 <오블리비언>처럼 기억의 상실, 즉 망각을 주된 소재로 하여 기억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영화로서 필자가 소개한 바 있는 <이터널 선샤인(브런치 글: 지울수록 특별해지는 사랑)>이 있다. 영화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택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이미 존재했던 기억의 사건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괴로운 기억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망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의 존재는, 그의 정체성은 자신에게서 깔끔하게 제거된다. 이렇게 테트는 잭과 비카의 기억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린 것이며 그때까지의 잭과 비카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또 다른 잭과 비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테트의 기억 제거는 더 강력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 <오블리비언>에서의 클론의 존재 근거는 "망각"이다. 하지만 이 망각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의 가능성마저 제거된 망각이다. 그렇기에 비카에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자신 내부에서 간헐적으로 피었다 사라지는, 설명할 수는 없는 희미한 그 무엇을 잭은 추적하고 또 갈망했다. 조덕배의 노랫말처럼 어느 꿈에 보았던 이름 모를 여인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이렇게 클론의 존재를 근거 짓는 망각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어딘가에 극미한 조각으로 희미하게 각인된, 그러나 결코 기억이라 부를 수 없는 원본의 강렬한 경험은 결국 기억으로 되살아나 클론으로서의 그를, 그리고 그의 존재를 흔든다. 물론 이것은 그저 하나의 사건이며 그것도 우연에 의한 사건이다. 망각은 기억을 전멸시켜 버렸지만 강렬하게 각인된 어떤 경험은 망각의 초토화가 닿지 못할 심연의 퇴적층 아래로 밀려나 웅크려 있다 피폐해져 버린 불모지에서 잡초가 싹을 틔우듯, 황량한 도심의 아스팔트를 뚫고 푸른 잎이 돋아나듯, 기억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무엇으로 그렇게 스멀스멀 피어났을 것이다. 물론 그 현현의 형태가 꿈이 되었든 환상이 되었든 관계없이 말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이제 그 무엇은 각성되어 기억으로 환생하는 사건을 만들어 낸다. 사건의 주인공은 하필 잭이었던 것뿐이리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가능성마저 없애버린 망각에도 불구하고 몇십 년 전에 잭에게 각인된 그 무엇은 황폐해져 버린 두터운 지층을 뚫고 올라와 그 질문을 하게끔 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 꿈의 여인이 우연히도 자신의 눈앞에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과 만나면서 그 무엇은 이제 기억이, 그것도 잭 자신의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잭은 잭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만으로 클론인 잭의 정체성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앞서 <6번째 날>에서 클론의 기억은 선험적 기억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클론의 기억은 클론이 경험하기 전에 그에게 소여된 기억이다. 따라서 실제로 그의 경험이 아닌 기억이다. 그렇기에 잭은 말한다, "난 그가 아니야."라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기억의 문제를 더 이상 깊게 밀고 가지 않는다. 철저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줄리아의 입을 빌어 그 기억마저도 서로 공감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줄리아 : 내게 했던 말 기억나? 모든 게 끝나면 호숫가에 집을 지어준댔지,

           그 집에서 함께 살찌며 늙어가자고, 싸우기도 하며 술고래가 되어 가면서...

           그러다 어느 날 죽어서 호숫가 언덕에 묻히면 세상은 우릴 잊겠지만 우린 늘 함께 있을 거랬지...

잭       : 기억나...

줄리아 : 그 기억은 당신 거야, 우리 거라고... 그 기억이 바로 당신이야!


   영화에서는 정체성의 근거로써의 기억을 더 확대시킨다. 잭을 잭이게끔 하는 그 기억은 단순히 하나의 클론을 각성시킬 뿐만 아니라 원본의 기억의 연대로서의 다른 클론의 정체성까지 정의하게 된다. 그래서 우연히 만나서 영문도 모른 채 서로 싸워야만 했던 49번 클론과 52번 클론은 그런 잠깐의 만남을 뒤로 한 채 각자의 길을 가지만 종국에는 원본의 기억을 따라 서로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렇기에 49번 잭과 52번 잭은 원본 vs 클론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한 잭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가정은 위험할 수도 있다. 줄리아는 그런 식으로 잭을 잭으로 인정하는 순간 당장 수천 명의 잭을 잭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까지다. 49번 잭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나머지 잭들은 모두 제거된다는 스토리를 전제했기에 기억의 공유와 공감을 정체성의 근거로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잭은 다음에 올 또 다른 잭을 기대하며, 또 다른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했기에,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 또 다른 자신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또한 그것 역시 자신과 함께 하는 것임을 인정했기에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본의 기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또 다른 잭은 자기 자신을 찾아 삼 년을 헤맨 후에 결국 줄리아와 해후를 하게 되는 순간, 난 잭 하퍼다, 난 이제 집에 왔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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