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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철 Jul 21. 2019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

본가보다 처가 생활에 전념한 세월의 대가


올해 2월 ‘쑥스럽게도’ 54회째 생일을 보냈다. 엄마가 안 계신 첫 생일이었다. 생일은 누구보다 ‘엄마’와의 인연이다. 유전자는 절반씩 물려받았지만 몸은 엄마를 각인하고 추억한다. 아버지가 훨씬 일찍 돌아가셨지만, 결국 나의 시점은 엄마로부터 계산된다. 엄마는 내 몸의 원조니까.


엄마 없는 첫 생일날, 만감이 교차했다. 내 유전자가 잘 적응하고 있는 걸까.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 엄마가 내놓은 분신을 내 맘대로 대해 온건 아닌지. 삶은 부조화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노화를 겪는다. 노안이 왔고 치아도 불안정하다. 뼈가 약해졌고 감기도 자주 걸린다. 건망증도 심해졌다.


작년 가을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도 그렇게 겪다가 가셨을 것이다. 나는 엄마와의 인연을 잘 챙기지 못한 아들에 속한다. 20세부터 객지 생활로, 40세에 결혼해서는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그 이후로 처가의 생활에 융합됐다. 장모님도 어머니지만 ‘엄마’는 아니다. 나는 처가에 살면서 장모님을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나를 낳고 돌아가시기까지 척박하게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12년의 세월은 더욱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차남인 나는 엄마의 날들에 대해 무지했다. 작년 가을 엄마를 업고 병원을 몇 번 들락거렸다. 엄마가 물려준 자식의 피부가 처음으로 생의 온도와 의미를 새긴 날이 돼버렸다. 담도암은 엄마를 나로부터 영원히 앗아갔다.


생일날 나는 여느 때처럼 미역국을 끓였다. 처가에서 요리를 한 지 6년이 되도록, 엄마한테 미역국 한 그릇 대접을 못 해 드렸다. 그 잘난 아들은 처가의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처가에서 펼친 나의 요리 세계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다. 물론 엄마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긴 했다.


엄마는 자식의 처가 생활과 요리하는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아마도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든든함과 서운함. 아들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과 한편으로는 본가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처가 생활에 더욱 집중했던 것 같다.


흔히들 얘기한다. 요리는 엄마에게 배운다고. 요리 능력은 엄마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겠다. 이 말은 주로 여자들 영역의 얘기다. 여자들은 엄마의 요리 유전자를 타고난다고까지 말한다. 사실 요리는 후천적 행위다. 그럼에도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기에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나는 남자로서 솔직히 엄마의 요리를 눈여겨보지 못했다. 아니, 아예 요리는 없는 세계였다. 뒤늦게 요리를 하면서 엄마의 영향력을 새삼 느낀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먹였고 성장시켰다. 엄마는 내 성장의 기제였고, 나를 만든 창조주였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 요리의 출처를 엄마로부터 연계시키곤 한다.



내가 살아생전 엄마에게 해준 요리는 딱 두 가지였다. 잡채 요리에 자신감이 붙던 어느 날, 김포에 있는 엄마 집을 방문해 잡채를 해드렸다. 명절날 엄마가 해준 잡채가 그렇게 맛있었다. 사실 잡채는 늘 맛있는 요리에 속한다. 당면의 고구마 전분이 주는 감칠맛, 각종 야채와 고기가 어우러진 진미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특히 내가 만든 잡채에는 특별함이 있다. 당면을 삶는 노하우다. 간, 색, 식감을 한 번에 잡기 때문이다. 장모님도, 엄마도 당면을 삶아 건져 다시 간을 해서 볶는다고 했다. 나는 그 이중의 작업을 한 번에 해버린다. 당면의 맛과 식감이 당연히 달라진다. 신기한듯한 엄마의 그 표정을 이젠 볼 수가 없다.


또 한 번은 엄마가 항암 투병을 할 때 만들어준 토마토소스였다. 항암 투병으로 엄마는 입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먹지 못하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요리를 하면서 먹는 일이 가장 소중한 영역임을 알게 됐다. 식욕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가치 역전도 요리를 하면서 생겨났다.


엄마는 토마토소스 한 병을 다 드시고 두 달 후 생을 마감하셨다. 토마토소스를 더 해드리지도 못했다. 토마토소스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는 말도 이젠 들을 수 없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장티푸스에 걸리셨고, 돌아가신 후 내 마음에 남은 상처를 이제야 나는 깨닫게 된다.


생일날 아침 식탁 자리가 묘했다. 장인 장모, 아내가 축가를 불렀다. 고령화 시대의 표본인가. 새로운 가족 조합의 현실인가. 이날 아침에도 나는 매번 해 왔듯 생일상을 차렸다. 미역국은 내가 편해서 끓인다. 아내는 케이크를 준비했다. 곁에서 축하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니 행복한 일이다.


인스타그램 친구들의 축하도 많이 받았다. 생신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나이도 꽤 들었음을 새삼 느낀 생일날이었다. 미역국만큼 모심을 자극하는 상징적인 음식이 또 있을까. 엄마를 소환시키는 미역국, 엄마 없는 첫 생일에 나의 요리는 또 다른 엄마의 자국이었다.


※ 요리 음식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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